[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1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8. 6.
#1
기분나쁜 더위가 계속되는 7월이었다.
서바이버리그 심소명과의 경기를 앞둔 진호는 마음이 급했다. 요환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사실이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형,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시간있을때 얘기하자."
진호는 바로 요환의 말을 끊었다. 진호는 윤열의 부친상 때문에 내려갔다 온 차였고, 어떤 프로게이머인들 그렇지 않으랴마는 이번 MSL에 꼭 진출해야 한다. 그래, 요환형의 개인적 문제는 연성이나 성제, 또는 주훈감독과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호야, 나 사람을 치었어."
진호는 핸드폰을 다시 고쳐 잡았다.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던 것이다.
"차 몰고 서울로 돌아오는데......밤이잖아. 졸리구. 그런데 누가 홱 뛰어드는거야. 정말 그 사람이 뛰어들었어. 내가 아니야......붕 날라서 저만치 나가떨어졌더라구. 피 막 흘리구, 도로에 차 한대도 안 지나가고, 아직 맥박이 뛰길래 어떻게든 살려야겠단 생각에 119부터 걸었는데 통화권 이탈이래구......"
끊지 말라는 듯 요환의 이야기는 쉴새없이 계속되었다. 진호의 머릿속에는 심소명과의 일전 따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좀 멀리 가면 안테나가 뜰까 해서 100미터 정도 쭉 걸어가는데 그래도 전화가 걸리지가 않는거야.
할 수 없이 죽은 사람 있는데로 돌아왔는데,"
진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사람이 없어졌어. 진호야, 그 사람이 온데간데 없어졌어. 핏자국도 없었어. 정말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가 않았어. 진호야, 나 이 얘기 아무데도 못하겠어. 어디가서 얘기하면 난 미친 사람 소리밖에 안 들을 것 같아."
"형이 꿈 같은 걸 꾼 게 아닐까? 요즘 스트레스 받아서?"
"잘 들어 진호야. 깜깜해서 잘 안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내가 아는 게임계 사람 같았어.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이었단 말야. 게다가 내가 전화 걸러 가기 전 내 뒤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어."
"뭐라고?"
"......'왜 그는 임요환부터 죽이지 않았을까?'"
#2
진호는 심소명에게 허무하게 패했다. 그 후로 요환에게서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요환도 그 일을 꿈으로 단정지은 모양이다.
젠장.
아마도 주훈 감독이 잘 다독여줬으리라. '너에겐 아무 일도 없었어. 어떻게 시체가 감쪽같이 없어질 수 있겠어.'라고 말이다.
그후 다시는 겁에 질린 목소리의 전화가 오지 않았다. 진호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메이저 결정전에서 패배한 후로 진호는 더욱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요환의 얘기 따위 싹 잊어버렸다. 그리고......
"진호야!"
경찰서 입구에 진을 친 기자들을 뚫고 주훈 감독이 진호의 몸을 감쌌다.
"진호야, 요환이가 너만 찾더라. 그래서 연락했다. 빨리 들어와라."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동수형 살인범을 요환이형이 봤대요?"
"나도 몰라.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을 안해. 신고는 요환이가 했대."
"이번 사건에 홍진호씨도 연관이 있나요?" 진호의 등뒤에 SBS가 새겨진 카메라가 바짝 붙었다. 그때 멀찌감치 앉아있던 요환이 진호를 발견하고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진호는 이제 완전히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서 천천히 걸어갔다.
요환에게 좀 가까워졌다 싶은 순간, 요환이 진호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챘다.
요환이 진호의 귀에 대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었어. 진호야, 그 사람이었어!"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2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8. 7.
#1
"관계자 아니면 다 나가 주세요. 거 참 방해만 되게...... 무슨 구경 났습니까?"
슬슬 신경질을 내기 시작한 형사들에 의해 진호도 기자들과 함께 멀찌감치 떠밀렸다. 저기 힘없이 앉아서 마지못해 대답하고 있는 그를 아무도 도와 줄 수가 없다.
"그냥 두껍고 뾰족한 거였어요. 칼도 아니고, 연장 같지도 않고, 쇠인 것 같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고...... 30센티는 넘었어요."
"임요환씨?"
"네?"
"정말 범인 얼굴이 기억이 안 납니까? 그렇게 피가 다 튈 정도로 옆에서 봤다면서요."
"모자를 푹 눌러 써서......보면 알 것 같은데 막상 설명하려면 모르겠어요."
진호가 그 말에 은근히 놀라 홱 뒤돌아보았다. 하얀 얼굴, 새까만 눈동자, 엄청난 두려움 앞에 굳게 다물어진 입술. 형은 조각품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저렇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얼굴조차 그냥 조각품 같을 뿐이다.
#2
경찰서를 빠져나온 진호의 앞에는 정수영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훈 감독과 달리 정수영 감독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실 진호도 뭘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진호는 동수에게 벌어진 사건을 안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뉴스에서 들은 게 다였다. 은퇴한 동수였지만 모든 게이머들이 이 소식에 놀라고 슬퍼했다. 그러나 방송매체들은 한낱 흥미 위주로 <프로게이머 살인사건>으로만 다룰 뿐이었다.
'형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굴까?'
진호는 고개를 한번 흔들어서 그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했다.
'수사는 경찰이 하겠지......'
진호가 눈을 감자 개인전 경기석에 앉아서 헤드셋을 막 끼고 있는 요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호는 그 맞은편 경기석에 자주 앉아 있곤 했지만, 형이나 나나, 그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자리야. 진호는 생각했다.
고독하다. 10만명의 사랑을 받고 10만명에게서 욕을 먹는 삶을 몇년이고 계속하고 나면 이젠 결승도, 승자와 패자도 중요해지지 않는 경지가 된다.
'남는 건 이 바닥 남자들끼리의 지겨운 인연이지.'
이제 진호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요환을 쫓는 공포의 실마리를 붙잡아 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차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진호는 물부터 한 잔 들이켰다. 옆에 강민이 서서 주스를 두 잔 따르고 있었다.
"경찰서 갔다 왔다며? 오렌지로 한 잔 주랴?"
"됐어."
"그럼 넌 사건에 대해 좀 들은 게 있겠다? 이거 뒤숭숭해서 원...... 우리도 인터넷에 기사 뜬 것 정도밖엔 모르니까 너무 답답해."
"난 기사도 못 봤어."
강민은 진호를 데리고 컴퓨터 앞에 앉은 뒤 사건 기사들을 보여 주었다. 옆자리에서 대충 모자이크된 현장 사진과 공포에 질려 있는 요환의 사진이 뜨자 진호는 얼른 스크롤을 내려버렸다.
나쁜 사람들. 이런 사진도 올리고 싶을까? 우리도 사람이란 말이다. 요환이형은 당신들 구경거리가 아니야. 젠장.
"동수형 찔리는 걸 보자마자 요환이형이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서 문을 잠갔대. 범인이 문을 몇번 쾅쾅쾅 치다가 그냥 나가버렸대. 다행이지?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현장 말고,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도 피가 있더래."
진호는 이미 강민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은 요환이형이 어디서 본 얼굴이랬어, 게임계 사람 같댔어,' 진호는 요환이 범인에 대해 자신에게만 일러준 말을 상기했다.
"왜 가스레인지에 피가 있냐구. 진짜 이상하잖아? 그리고 진호야, 이 사진 봐봐. 동수형이 피로 써서 단서를 남겼어."
사진에는 오른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 동수가 왼손으로 쓴 "여"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3
성제도 감히 요환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요환은 언제 지금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진석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음성 메시지를 들었을 때?'
'아니.' 요환은 고개를 흔들었다. '결코 그건 아니야.' 요환은 눈을 감아버렸다.
'여', 그 한 글자.
......동수는 남기고자 한 단서를 다 쓰지 못한 것이다.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3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8. 9.
#1
동수가 남긴 단서 한 글자를 두고 진호와 민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MSL 결승전을 앞두고 옆자리에서 저그전을 연습하고 있던 정석도 어느새 고개를 내밀고 열심히 보고 있었다.
'나 같으면 이럴 때 마우스를 잡을 수 없을 거야, 대단한 정석이. 요환이형도 대단하지, 내가 그런 소릴 들었으면 멀쩡히 광안리에 가지 못해...... 하기야 형도 결국 출전 못한 셈이지만......'
정석의 기억 속엔 영원히 한빛스타즈의 김동수 아니었는가. 진호는 그런 정석을 보며 생각했다. 그때 정석이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여 말이제, 옆에서 보면 요 아닝교?"
그러나 강민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더 날카롭게 말했다.
"너 같으면 의식도 희미하고 그것도 왼손으로 쓰는데 90도 돌려서 쓰겠냐? 사진 봐봐, 팔이 이렇게 몸에 붙어 있어서 일부러 옆으로 쓰기도 힘들어. '여'가 맞아."
"범인이 여자였다는 뜻일까?"
"여자였으면 요환이형이 보고 알아챘겠지. 근데 남자였다고 했대잖아."
"글마가 동수햄 아는사람이믄, 범인 이름 남긴거 아닌기가?"
요환이형이 아는 게임계 사람 얼굴이었댔어. 어쩌면 동수형도 아는 사람일지도, 정말 범인 이름을 쓰려고 했을는지도 모르지. 게임계에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진호와 정석 모두 말 없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강민은 어느새 다른 창을 띄우고 딴짓을 했다. 그는 So1배 스타리그 진출자 명단을 보면서 아주 무심한 태도로 말을 툭 던졌다.
"왜 여만 생각하냐? 받침도 쓰려다 다 못 썼을 수도 있지. 여기도 있네, 연성이, 영종이......"
진호와 정석 모두 입을 딱 벌리고 강민을 쳐다보았다. 민이는 그런 말을 던져 놓고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히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다.
#2
민이가 복사, 붙여넣기 해둔 기사모음을 프린트해서 진호에게 건네주었다. 진호는 별 생각 없이 받아서 반으로 접어 들었다.
민과 정석이 러시아워 맵과 꽃밭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자 진호는 그 자리를 떠났다. 정석이 상대는 마재윤이지. 마재윤이 아니라 용호였으면 좋았겠지만, 나라면 더 좋았을 거야. 진호는 입맛이 씁쓸했다. 아까 강민이 마시던 주스를 한 잔 따라서 그자리에서 다 마셔버렸다.
'형은 꼭 내가 소명이랑 붙기 전날에 그런 얘기를 해야 했을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대체 그 사고는-만약 정말 일어났다면-언제 일어났길래? 진호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경찰서에서 본 요환의 그 곤란한 표정, 두려운 표정이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아 그간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조지명식때 직접 만나면 물어봐야지. 지금은 뭐 연성이, 성제, 용욱이, 뭐 형 곁에 있어 줄 사람은 많지 않나. 진호는 애써 요환 걱정을 지워버리며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
그때 요환이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이 생각났다. 그림자를 끌고 가는 것처럼 들리던 그 절망적인 목소리......
<"잘 들어 진호야. 깜깜해서 잘 안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내가 아는 게임계 사람 같았어.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이었단 말야. 게다가 내가 전화 걸러 가기 전 내 뒤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어."
"뭐라고?"
"......'왜 그는 임요환부터 죽이지 않았을까?'">
지금 누군가가 바로 boxer 임요환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잔을 비우고 나서도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형이 처음 전화로 그 얘길 했을 때만 해도 난 그런데 무슨 음모라거나 암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동수형이 죽은 지금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현실로 드러났어. 그리고 그 '게임계 사람'은 그 음모를 알고 있었던 거야. 요환이 형의 순서가 오기 전 동수형이 먼저, 젠장.'
진호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다. 이런 협박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우리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왜 하필 형인데? 불러낼 사람 있으면 임요환, 욕할 사람 있으면 임요환, 다들 그렇지. 대체 뭘 잘못한 게 있다고! 내가 꼭 알아내겠어. 누군지 알아내기만 하면......"
"죽여버려야지!"
진호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강민이 씨익 웃고 있었다. 그에 뺨에 와서 부딪치는 진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강민은 냉장고 문을 쾅 닫았다.
"분명히 윤환일거야. 골드키위 내가 선물받은 거니까 반만 먹으라고 했는데 한개도 안 남겼어."
강민이 냉장고 문을 가볍게 한대 차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도대체, 민이를 알 수가 없다.
#3
KTF는 So1 조지명식이 열리기 한참 전에 도착했다. 진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각 팀들이 도착해서 대기실은 북적거렸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신이 맡은 여자 환자와의 진료약속을 자꾸 잊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왜 그것만 자꾸 잊어버리는지 고민했다. 프로이트는 그것이 그녀의 위장병을 신경증으로 오진한 자신의 실수를 망각하고자 하는 무의식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세기는 그렇게 열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억력이란 얼마나 편한 것인가. 잊고 싶다는 생각이 결국 잊게 만든다는 게 사실이라면.
'저 아이들은 그 사이 동수형 일을 다 잊어버린 걸까. 편해. 인간의 기억력이란 너무 편해.'
그 사이에 파랗고 미끈한 T1 유니폼이 보였다. 연성이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건지 요환은 킥킥 웃고 있었다. 진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요환의 등을 쿡 찔러 구석으로 불러냈다.
"나도 편했으면 좋겠어. 형처럼 잊고 싶은 생각은 잊으면서 해탈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게 안 되네. 말 좀 해봐, 혼자 비밀을 다 껴안기 힘들면 나한테 말해도 되잖아."
요환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 우울증 때문에 정신과 다녔어. 약 먹으니까 좋더라."
진호는 그제서야 깜짝 놀랐다. 살인을 현장에서 보고도 계속 게임을 해야 하는 요환에겐 그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진호가 진심으로 동정하는 표정을 짓자 요환은 민망해 했다. 그때 요환의 어깨 너머로 영종과 지호가 얘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진호는 동공이 커졌다. 강민의 농담 같은 말이 비로소 생각났던 것이다.
※작가 코멘트: 프로리그 결승전에 대한 내용이, 이후에 등장할 조지명식 장면보다 먼저인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4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8. 10.
#1
"얼마나 다닌 거야?"
"약 잘 안 듣는다고 했더니 이것저것 바꿔주더라. 고생만 했어. 시간도 지켜야 되고 먹는 게 영 까다롭더라. 감기약이나 두통약하고는 차원이 달라."
진호는 이미 흘려 듣고 있었다. 영종과 지호의 뒤로 마침 연성까지 지나가고 있다. 민이가 한 말, 농담같지만,
......진실은 언제나 농담같은 법이야. 진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형, 형이 봤다는 그 사람 말이야,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 보였어? 우리보다 많아 보였어, 적어 보였어?"
"깜깜해서 잘 안 보였어. 동수 집에서도 모자 눌러 쓴 것만 봐서......"
"그래도 뭔가 봤으니까 나한테 두 번이나 '그 사람'얘길 한 거 아냐. 나이 정도는 얼핏 보기만 해도 가늠할 수 있잖아. 얘기 좀 해봐."
"최소 니 또래거나 그보다 더 어려 보였어. 내가 어디선가 봤다 싶었으니 이 좁은 바닥의 누군가,"
진호가 그의 말을 얼른 끊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형, '여'말인데, 범인 이름이랑 관계있단 생각 안 해 봤어?"
진호의 시선 방향을 느낀 요환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잠깐의 순간에 요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진호 이자식 도대체 누굴 의심......?'
"키 컸어? 응? 형보다 컸어? 180은 넘어?"
도박같다. 빠르게 돌아가는 기계가 멈추면 세 개의 그림이 맞춰진다. 다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요환의 머릿속에 그 그림이 맞춰졌다.
"그래, 많이 컸어. 나중에 또 얘기하자. 조금 있으면 촬영 들어가겠다."
요환은 짧게 대답하고 뒤돌아섰다. 한 마디에서 천 마디 이상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진호는 아직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2
경찰서에서 요환은 진호에게 말했었다.
"그 사람이었어. 진호야, 그 사람이었어!"라고.
그 계임계 사람, 차에 치었는데도 잠깐 사이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수수께끼의 인물,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동수형을 찔렀다는 그 사람,
요환을 위협하는 자를 '그'라고 호칭한 그 사람은 분명히 음모를 아는데다 동참까지 한 것이다.
도대체 누굴까. 동수가 남긴 '여'라는 단서와는 정말 관계가 있을까.
연성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발걸음을 돌리던 진호는 도저히 놓칠 수가 없는 한마디를 들었다. PD가 요환에게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다. 왜 그게 진호가 서 있는 자리까지 들렸는지는 모르지만 진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정말 협회에 답 안 줄 생각이야?"
요환이 벽에 딱 붙어 서서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고개를 약간 꺾어 진호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요환이 대답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낮고 작았다. 그러나 시선은 진호가 그 말을 들어 주길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꽂혀왔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동참할 생각이 없어요."
......홍진호. 그는 주먹을 꼭 쥐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5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8. 10.
#1
진호는 쿵쿵 소리가 날 정도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요환과 PD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까닭에 다른 게이머들도 놀라서 돌아볼 정도였다.
"무슨 얘기중이세요?"
PD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응, 아직 결정난 게 아니어서 말하기가 좀 그런데,"
요환이 재빨리 그 말을 끊고 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했다.
"유료관중 입장시켜서 자선 경기를 했으면 하신대."
"그래, 맞아. 요환이 말대로야. 아직 정해지진 않았어."
진호의 귀에는 그 말이 너무나 궁색하게 들렸다. 요환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진호는 생각했다. 형은 내가 알아 주기를 바라고 있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알아내 주기를 바라는 무언가가 있어. 뭐, 유료 입장 경기? 닥치라고 해.
그때 진호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강민이었다.
[오늘 만나면 날짜부터 한번 물어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민이가 무엇을 얼마나 알길래 이런 문자를 보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진호는 나가려는 요환을 바로 붙들어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형, 그 사고 말이야, 며칠 밤이었어? 몇시인지도 기억나?"
"조지명식 끝나고 얘기하자. 지금 다 나가잖아."
"왜 얘기를 안 하는건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연성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진짜 그 사고 꿈이었어? 헛것 본 거였어? 우울증 약 먹고 기분 좋아지니 이제 다 없었던 일 같다? 정말 그런거야?"
"나도 모르겠어. 난 분명히 겪었는데, 나 자신도 안 믿기는 얘기잖아. 죽진 않았댔지만 어쨌든 차에 치인 사람이 잠깐 사이에 없어졌어. 그게 말이 돼? 누가 믿어주겠어."
"내가 믿어."
그의 눈빛이 게임할 때처럼 타올랐다.
"이 홍진호가 믿고 있다고!"
순식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시선을 둘 곳은 진호의 두 눈 뿐이다.
눈머리에서 시작해서 눈꼬리까지 떨어지는 외꺼풀 라인.
착해 보이지만 둔중하지 않고, 천진해 보이면서도 믿음을 주는 그런 곡선이 아닌가.
진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자 진호와 요환이 싸우는 줄로 오해한 연성이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진호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요환이형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동수형의 죽음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약해진거야. 요환이형 본인부터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사실을 처음부터 밝혀낼 수가 있겠어.
그때.
"진호야."
요환이 뒤돌아선 진호를 붙잡았다. 그는 연성에게 들리지 않도록 진호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5월 19일이었어. 시간은 기억이 안나지만 저녁해가 완전히 넘어간 직후였어."
요환은 말이 끝나자마자 연성의 팔을 붙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에 남겨진 진호는, 그러나 웃고 있었다.
임요환은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항상 그래왔듯이, 요환은 강했다. 진호는 웃고 있었다.
#2
그 시간 KTF 숙소.
"형 꺼 하나만 남겨놓지 그랬냐. 그렇게 먹고 싶었으면 형이 담에 또 사주면 되잖아."
냉장고 옆에서 강민이 윤환을 장난삼아 놀리고 있었다. 정수영 감독이 힐끔 쳐다보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다른 과일들을 꺼내면서 손수 칼을 집어들었다.
"감독님, 직접 깎아주시게요?"
윤환이 금방 얼굴이 밝아져서 휘파람을 불었다. 정감독은 멋적게 웃으며 윤환에게 말했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서 항상 헤헤냐. 난 동수 생각하면 지금도 밥이 안 넘어가누만......"
"누군들 안 그렇겠어요."
"도대체 동수가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동수형이 갑부도 아니고. 집에 없어진 귀중품도 없대고. 고작 20대 중반 나이에 벌써 누구한테 그리 큰 원한을 샀을 리도 없고. 그러면 이유는 뻔하잖아요."
민이는 정감독이 방금 깎아서 떨궈놓은 참외 한 쪽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접시는 쳐다보지도 않고 민이의 입에서 다음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이유없이 살해당하는 이유는 결국 그런 거 아니겠어요. 봐서는 안될 걸 봤거나,"
정감독은 칼로 자기 손가락을 깎을 뻔했다. 민이는 토끼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윤환을 무시하고 접시에 마지막 남은 참외 조각을 포크로 찍었다.
"......알아서는 안될 것을 알고 있거나."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6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8. 11.
#1
정말 민이 추측대로 동수형의 단서가 범인의 성이나 이름 첫글자를 의미한다면,
당장 KeSPA 홈페이지에서 리스트 한번만 띄워보면 되겠지. 그 중에서 5월 19일 밤에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환형의 말대로 나보다 어린 키 큰 게이머라면, '그 사람'을 찾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리라.
진호는 완전히 마음이 편해져서 지훈과 수다를 떨었다. 누군지 몰라도 거의 다 잡은 셈 아닌가.
처음 진호가 의심했던 연성이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오히려 의심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19일이면 지훈과의 OSL 8강전 전날로 기억한다. 지훈도 즉석에서 맞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런 날 밤중에 엉뚱하게도 서울 근교의 도로에서 차에 뛰어들다니, 미친 사람 아니고서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요환형이 연성과 붙어 다니고 있는데 연성이가 사건과 관계있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또 누가 있더라? 박영민? 손영훈?'
마이크를 잡고 있던 연성이 그 순간 진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는 마치 앞일을 암시하는 것처럼 한없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2
요환은 PD와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냐고 캐묻는 진호를 무마하고 연성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진호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지.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내가 절대 말해주지 않으리란 것을.
그리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아까 진호는 분명히 연성이나 영종이를 의심하고 있었어. 세상에.'
긴 연습을 끝내고 새벽에 침대에 누운 요환에겐 또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한숨을 훅 하고 내쉬었다.
'만약 내가 본 게 정말 연성이었다면 차라리 먼저 내 눈을 의심할지언정 절대로 연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 진호는 그걸 아예 고려하지도 않고 있어.'
성제는 요환이 뜯지도 않고 내팽개친 약봉지로부터 애써 시선을 거두었다. 요환이 눈을 감은 것을 보고 적잖이 안심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잠든 것이 아니었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꿈이면 더 좋으련만, 그것은 가혹한 회상이었다.
<"이야, 아이스박스 차에 싣고 온거야? 대단해! 맥주가 얼마나 들었길래?">
요환에게 현관문을 열어 주면서 동수가 반갑게 말했다. 요환은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동수의 집 문을 잠갔다.
<"신발 저기다 벗어 놓고 올라와. 많이 사왔어? 안주는 내가 좀 볶아놨어. 귀한거야, 내가 직접 만든거야.">
요환이 그 말에 빙그레 웃으며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맥주캔이 가득 들어 있고 얼음으로 차 있었다. 동수가 가스레인지 쪽을 쳐다보며 아직 열이 식지 않은 프라이팬 위의 소세지를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웬일이야 대체, 나를 다 찾아주시고? 역시 스타판은 떠났어도 난 아직 안 죽었다니까.">
요환이 눈을 번쩍 떴다. 성제가 평범한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세상에 완전히 잊혀지는 기억이 어디 있겠어. 달팽이 한 마리 말라 죽어있는 걸 봐도 가슴이 짠해지는 게 인간인데.
그때 내 하얀 옷에 튀었던 엄청나게 많은 피가 하얀 천만 봐도 떠올라. 나가지 마, 성제야, 이 방을 나가면 안돼......
첫 번째는 등, 두 번째는 갈비뼈 사이. 범인은 동수가 두 번의 비명을 지르도록 방관했다. 결국 그의 집 현관 벨소리가 울렸다.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일 있어요? 문 열어 보세요!">
이웃이 비명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벨소리가 모든 상황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도 요환은 가끔 생각한다. 운명은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여기, 살인입니다. 사람이 찔려 죽었어요. 네, 제가 봤어요, 아니요, 저는 방에 숨어 있구요 범인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빨리 와주세요...... 빨리 와주시지 않으면 저까지 죽어요......">
요환이 핸드폰 폴더를 닫을 때쯤 더이상 벨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이웃은 떠났다. 그것은 동수에게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려웠다. 미칠 듯이 두려웠다.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7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8. 11.
I didn't hear you leave, I wonder how am I still here
I don't want to move a thing, it might change my memory
Oh I am what I am
I'll do what I want
But I can't hide
I won't go, I won't sleep, I can't breathe, until you're resting here with me
-Dido "Here with me" 중에서
#1
사이렌 소리, 무전기 소리, 경찰들의 긴박한 목소리. 1초가 1시간처럼 흘러갔다. 제발, 제발!
요환은 방문에 귀를 가까이 대고 숨을 죽였다.
방문은 잠겨 있다.
문이 쾅쾅쾅 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경찰들이 두드리는 소리였다.
<"신고하신 분 안에 계십니까? 경찰입니다!">
이제 경찰은 거의 문을 부술 기세로 때려대고 있었다.
<"안에 계십니까? 나와주세요! 안전합니다. 범인은 도주했습니다!">
#2
수수께끼가 풀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가는 밴 안에서 진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민이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용호, 정석과 함께 들어선 KTF 숙소에서는 강민과 조병호가 야식을 먹고 있었다. 민이 다정다감한 평소 모습 그대로 진호에게 말을 붙였다.
"너도 한 그릇 주랴?"
"깡만 잠깐 나랑 말좀 하자."
살기까지 느껴지는 진호의 눈빛을 보고 병호가 몸을 움츠리더니 몇 숟가락 남은 밥그릇을 가지고 그대로 주방으로 가버렸다. 병호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진호가 민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까 보낸 뜬금없는 문자는 뭐야?"
민은 입안 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딴청을 부렸다. 저 수더분한 모습을 보면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 민이의 예리한 면모.
게임을 할 때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저녀석은 지금 뭔가 눈치채고 있다.
"나중에 얘기하자고. 너 때문에 병호가 밥도 못먹고 도망갔잖아. 세상에, 병호가 밥을 다 남겼다고."
"너 도대체 뭘 어디까지 아는 거냐구?"
아까 민이 보내온 문자를 들이댔다. 코 앞에 핸드폰이 왔다갔다하는데 강민은 그저 한 숟가락 더 뜨면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요환이형이 너한테 경찰도 모르는 얘기를 했잖아."
"그걸, 그걸 니가 어떻게 알어?"
"척 하면 몰라? 형이 불러서 경찰서엘 갔다오고. 갑자기 누군지 알아내면 죽여버리겠다고 하질 않나,"
"그때 죽이겠다고 한건 너야."
"그랬나?"
진호는 결국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민이는 밥을 느릿느릿 천천히 먹었다. 진호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니가 요새 어울리지도 않게 과묵하고 사색이 돼 있으니까...... 고민이 있다 싶었지. 동수형, 요환이형 일에 니가 뭔가 굉장히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 조지명식이니까 만난 김에 물어보라고 한 거야."
그러고 보니 넓지도 않은 행동반경 안에서 같이 생활하는 강민인데 그 정도야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것 아닌가. 진호는 긴장을 풀고 수저를 하나 더 가져왔다.
"그리고 니가 요환이형 전화 받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