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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10/26 22:40:45 |
Name |
총알이 모자라. |
Subject |
존 매켄로, 데니스 로드맨 |
70년대 중반부터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의 경쟁구도가 가속화될 무렵, 남자 테니스계는
또 하나의 신예 선수의 등장으로 3파전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그가 바로 ‘코트의 반항아’ 또
는 ‘코트의 악동’으로 불리웠던 미국의 존 매켄로이다. 미국은 지미 코너스에 이어 매켄로
의 등장으로 70년대 중반까지 명성을 떨쳤던 호주 테니스를 따돌리게 되었으며 두 미국인
은 스웨덴의 비욘 보그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파전 테니스 전쟁을 치르게 된다.
존 매켄로는 1959년 2월 16일 독일의 비스바덴(Wiesbad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독일에 주둔하고 있었던 미 공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독일 근무기간에 존 매켄로가 태어나게 된 것이며 얼마 후 가족은 곧 미국으로 귀국, 어린
존 매켄로는 유년기를 뉴욕주 더글라스턴(Douglaston)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포트 워싱턴 테니스 학교에서 본격적인 테니스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고 빼어난 실력
을 발휘, 차세대 미국의 기대주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처음으로 국제적 관심이 집중된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77년. 프랑스 오픈 혼
합복식에서 자신의 파트너인 메리 카릴로(Mary Carillo)와 함께 우승을 차지하면서부터
이다. 같은해 윔블던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지미 코너스에게 4세트만에 패배), 오픈시대
이후 최초로 예선통과자, 아마추어로서 준결승 진출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캘리포니
아의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인 1978년 전미 대학선수권에서 우승하면서 학
교를 그만두고 비로소 프로의 길을 걷게 된다. 프로 데뷔후 반 년 간 49승 7패 --;;를 기록
했던 존 매켄로는 곧바로 데이비스컵 미국대표로 발탁되어 5년만에 미국이 데이비스컵을
차지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다른 미국 선수들보다도 국가관이 투
철했던 매켄로는 이후 12년간(78-84, 87-89, 91-92)이나 데이비스컵 미국대표로 활약하게
된다.
그의 첫 메이저 단식 타이틀 획득은 79년 US오픈에서 이루어졌으며 81년까지 3년 연속,
84년에 또 한차례 US오픈 왕좌에 올랐다. 81년 윔블던 결승에서는 전년도에 이어 비욘보
그와 또 한번 라이벌대결을 펼쳐 80년 결승에서 당한 한많은 패배를 앙갚음하면서 윔블던
왕좌에 처음으로 오르기도 하였다. 83년과 84년에도 연속으로 윔블던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그는 윔블던 3회, US오픈 4회 우승이라는 기록(특히 US오픈의 3년연속 타이틀은
20년대 빌 틸든(Bill Tilden)이후 최초로 기록되기도 하였다.)을 남겼으며 복식을 포함, 총
17개에 이르는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존 매켄로의 등장으로 73년 이후 집계된 컴퓨터 랭킹에도 지각변동이 있었다. 77년 8월부
터 80년 3월까지 지미 코너스와 비욘보그가 서로 나누었던 1위의 자리를 드디어 존 매켄로
가 차지면서 랭킹1위의 구도는 비욘 보그-존 매켄로로 바뀌었다. 이러한 구도는 81년까지
지속되다가 비욘 보그가 은퇴하자 랭킹1위 쟁탈전은 다시 지미 코너스-존 매켄로로 바뀌
었으며 이는 83년 2월 이반 랜들(Ivan Lendl)이 1위를 차지할 때까지 계속된다. 매켄로가
기록한 총 170주 1위 달성은 지미 코너스(268주)에 이어 당시 역대 2위의 기록이었다.(후
에 랜들과 샘프라스에 의해 갱신) 또한 그는 메이저 타이틀을 포함, 생애통산 77회에 이르
는 싱글 타이틀을 보유하여 오픈시대 이후 지미 코너스(109회)와 이반랜들(94회)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복식을 포함(154회)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
록으로 역대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비욘 보그가 톱스핀의 제왕이었다면 존 매켄로의 장기는 무엇이었을까. 테니스 전문가들
은 공통적으로 그의 탁월한 발리(volley)감각을 꼽는다. 스트로크중 발리 포인트를 쉽게
찾아내 환상적인 네트플레이를 선보였는데 특히 슬라이스 발리(slice volley)는 왼손잡이
선수 중 최고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듯 훌륭한 플레이로 많은 팬들을 사로잡았지만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만만치 않
다. 경기에서 실력 이외에 중요한 요소로 페어 플레이를 꼽는 많은 팬들은 주심과 선심에
대한 그의 거친 매너 때문에 그를 기본적인 자질이 부족한 선수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주심을 향해 라켓을 집어 던지기도 하고 선심에게 심한 욕설을 하며 경기의 흐름을 방해하
는가 하면 이러한 행위로 인해 상대 선수의 정신적 리듬까지도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코
트의 악동’이라는 그의 닉네임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관중
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 그의 ‘튀는 행동’은 그를 더욱 더 인기스타로 만들었다. 또한 상
당수가 그의 투철한 애국심을 높이 사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는 테니스에 관한한 미국 국민
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다.
1999년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그는 미국의 데이비스컵 감독으로 내정, 샘프라스와 애거
시를 합류시켜 ‘드림팀’을 구성했지만 큰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어느 부동산 업계의 부호
가 제시한 100만불짜리 이벤트 “존 매켄로-비너스 윌리엄스의 성대결”을 거부하며 돈으
로 자존심을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현재 세계 남자테니스를 움직
이는 ‘큰 손’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각종 스포츠 뉴스의 해설자로 활동하
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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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을 접해봤을 선수 데니스 로드맨.
어떤 사람은 그가 어떻게 NBA에 살아남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그는 시대를 잘 타고난 선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고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면서 사춘기를 보내다가 우연히 농구를 접하면
서 농구에 빠져들었던 로드맨은 사우스오크 크리프 고등학교 2학년말에 처음 농구부로 가
입했다. 그리고 6개월간 벤치멤버를 경험하고 쿡 카운트 주니어 칼리지에서 1년간 활약한
후 "농구로 성공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NAIA(NCAA와는 또 다른 대학조직)에 소속해 있
는 사우스 이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로 이적했다.
그후 같은 팀 포지션 선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데 당시 로드맨은 득점도 많
이하며 3년 연속으로NAIA의 올 아메리칸에 뽑혔다. 4학년떄는 평균 24.4득점,17.8리바운
드를 기록하고 NBA문들 두드린다.
86년 NBA문을 두드리기 위해서 드래프트를 신청한 로드맨은 당시 NCAA선수가 아니었다
는 후회할 정도 관심밖에 밀려나 있었다. 이런 로드맨을 눈여겨 본 디트로이트의 척 데일
리 감독이 드래프트 2차 전체 27위로 지명하면서 디트로이트에 입단하게 된다. 이때부터
척 데일러는 로드맨의 스승이자아버지 노릇을 했고 로드맨 역시 척 데일리 말이라면 순종
했다.
로드맨이 입단할 당시 피스톤스는 토마스, 듀마스, 레인비어를 주축으로 NBA정상을 향
해 달리는 팀으로 파워포워드가 부족했었는데 그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척 데일리가 득점
보다 수비와 리바운드를 강조하자 득점을 포기하며 "배드 보이즈"의 주전이 되었다.
이후 로드맨은 선수들의 슛 경향을 분석하고 공이 어디로 튕겨나오는지 기록했다..
(하루의 3분1을 비디오 분석에 매달렸다)
또 팀 선배 빌 레인비어로 부터 끈기와 볼 탭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팔을 이용해서
상대를 껴안는 교묘한 테크닉으로 상대방보다 더 많은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했다.
레인비어는"상대방이 크면 그의 유니폼을 잡아당기고"
상대방이 파워가 있으면 물고 꼬집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과 리바운드에 대한 신념은 그를 리그 최고의 리바운더로 만들었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배드 보이즈는 많은 비난과 함께 토마스의 은퇴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고 로드맨이 존경했던 척 데일리감독이 뉴저지로 이적하면서
팀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켰다.
피스톤스은 로드맨을 트레이드하기로 결정했고 그 당시 오펜스 리바운드와 파워포워드가
취약했던 스퍼스와 2:2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스퍼스로 이적해서도 로드맨의 방황하던 로드맨은 척 데일리 불같은 호령에 다시 정신을
차리며 해군 제독 로빈스과 트원 타워를 구성했지만 신사 로빈스과 로드맨은 물과 기름같
은 존재였다. 다시 불화는 싹트기 시작하며 95년에 월 퍼듀와 트레이드로 불스로 이적한다
불스로 이적한 로드맨은 감독 필 잭슨과 대화를 통해 다시한번 의욕을 되찾았고피스톤스
당시 제일 싫어했다던 조던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팀에 빠르게 적응해 96시즌 팀 우승
의 일등공신으로 리바운더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전세계 NBA팬들에게 널리 알렸다
조던과 함께 플레이하는 것을 즐거웠다는 로드맨은 "피스톤스 시절이후 가장 행복했던 시
절이었다" 말했다.
이후 조던의 은퇴, 피펜이적과 함께 은퇴를 했던 로드맨은 데일리 이후 존경한 감독 필 잭
슨의 부름을 받고 다시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하고 레이커스 유니폼입고 다시 코트에 복귀
했지만 예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다시 코트를 떠났다..
그후 진정한 리바운더를 NBA에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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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셔널 지오그라피의 다큐멘터리에서 스포츠 심리학을 다루었다. 거기에 코트의
악동인 존 매켄로에 대해 스포츠 심리학자는 말한다.
‘그는 게임이 잘 풀리지 않으면 마구 화를 냅니다. 그런데 그것은 흥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극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봐, 넌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잖아, 좀 더 빠르게 뛸 수 있잖아 이 멍청아! 하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다른 선수들이 그랬다면 아마 스스로 무너졌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약간 괴짜죠’
모든 종목의 선수들은 게임을 풀어가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개성이라고 한다.
요새 테니스는 예전 만큼 인기가 없다.
인간이 받아낼 수 없는 강한서브덕분이기도 하지만
매켄로가 지금 활동했다면 아마 서브 리시브를 못할 때마다 마구 소리를 질러 댔을 것이
다. 그나마 약간의 재미는 줄 수 있지 않을까?
NBA역사를 통틀어 로드맨은 민첩함, 스피드. 체력을 조화시켜 자기보다 큰 선수를 수비
하고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로우 포스트에서 궂은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던 선수
다. 상대팀 선수들은 그를 아주 싫어했다. 심지어 같은 팀에서도 불화가 많았다. 상대 선수
의 엉덩이를 만지며 음담패설을 내뱉는 그를 누가 좋아하랴? 그러나 그는 최고의 리바운
더 였고 그의 가치는 그가 떠난 후 더 크게 보였다. 반항적 이미지만 남아있지만 그의 열정
이 그리워지는 요즈음 NBA이다. 지금 NBA에 부족한 것은 조던의 화려함이 아니라 로드
맨의 장난기는 아닐까?
언젠가 우리도 이스포츠계의 반항아들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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