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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8/26 01:39:34
Name 한윤형
Subject 내가 스타리그를 좋아하는 이유
안녕하세요. 군대가기 직전에 가입해서 글을 두개 썼었죠. ^^; 1차 정기휴가 나왔는데, 오늘 복귀합니다. -0-;;;

이 글은 스타리그의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제가 스타리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기술한 글입니다. 이런 이유로 스타리그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구나, 하시면서 한번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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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님이 스타크래프트를 얘기했을 때, 나는 "아, 사실 저는 '스타크래프트'가 아니라 '스타리그'에 관심이 있는 건데."라고 말했다. 그 이유인 즉슨, " '따라잡기'가 없는 취미잖아요." 이택광님도 그 말 한마디로 내가 말하는 바를 알아듣고 본인이 주목하는 이유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따라잡기'가 없는 취미라는 말은 그 취미의 외부에 '월드컵'이나 '메이저리그'와 같은 타자의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근대는 '서양 따라잡기'의 근대였고, 그것은 스포츠라는 취미의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스타리그는 한국에서 발생한 탓에 '따라잡기'가 없는 첫번째 취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엔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우리는 K리그를 봐야 한다. CU@K리그."와 같은 물구나무선 강요도 없다. 스타리그를 보다가 어느날 축구경기를 다시 볼 때에, 나는 주변부 사람으로 태어난 탓에 공기처럼 익숙해진 그 강요가 실은 얼마나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인지 새삼 체험한다. 더 이상 축구를 즐길 수 없게 되고, 본프레레가 짤리든 말든 신경을 꺼버리는 것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를 본받아 "우아하고 감상적인 한국 스타크래프트"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스타리그의 팬들은 이미 자신들끼리 거대한 맥락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유닛의 상성관계에 대한 맥락, 프로게이머의 상성관계에 대한 맥락, 스타리그의 에피소드에 대한 팬들의 반응에 대한 맥락, 그저 맥락이 만들어낸 맥락, 이 모든 것들을 소스로 삼아 텍스트는 무한히 증식한다. 이미 거기에는 탁월한 작가도 있다. 동일선상에 있다고 볼 수 없는 저 많은 맥락들을 교차시켜 서술하는 그런 이들의 글을 보자면, 현기증이 날만큼 재미를 느끼면서 데굴데굴 구르게 된다.

가령 SEIJI라는 사람이 있다. "슬램탱크"나 "마우스 세팅하던 노인"처럼 원본 텍스트에 스타리그의 맥락을 접맥한 글을 쓰는데 유능한 사람인데, 이 사람의 글을 읽다보면 최소한 세 개 이상의 맥락의 층위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1) 원본 텍스트 2)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 3) 스타리그의 에피소드 4) 그리고 스타리그 팬덤 그 자체. 특히 "마우스 세팅하던 노인"은 이미 다른 이가 착상을 하고 쓴 글을 그의 재능으로 리메이크한 것인데, 그렇기에 더욱더 재미가 쏠쏠하다.

최근 연재되고 있고 아직 끝이 안 보이는 (그렇게 치면 "슬램탱크"도 연재되다가 말았지만) "스타 삼국지"의 몇구절을 예로 들어보도록 하자.

홍진호가 지긋이 눈을 감다 다시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내가 남에게 4드론을 할지언정 남이 나에게 벙커링을 하지는 못하게 하리라!"


"내가 세상을 버릴 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지는 못하게 하"겠다는 조조의 대사의 패러디 구절인데, 이 짧은 구절에 압축된 유머에 공명하여 데굴데굴 구르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1) 스타크래프트 저그라는 종족은 해처리에서 모든 유닛이 나오는 종족으로, 일꾼을 뽑는데 주력할지, 공격유닛을 뽑는데 주력할지에 따라 전략이 크게 바뀐다.

2) 공격유닛을 뽑는데 주력하는 저그는 '가난한 저그' ,'초반 저그'라고 불리는데 홍진호 선수는 그 대표자다.

3) '4드론'은 일꾼(드론)이 네 마리인 상태에서 곧바로 공격유닛(저글링)을 뽑아 돌진하는, 저그 유저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도박적인 플레이다.

4) 홍진호 선수는 2004 에버배 스타리그 준결승에서 임요환 선수에게 3연속 벙커링(4드론과는 맥락이 꽤 다르지만 이는 테란의 초반 도박적인 플레이다.)을 당하며 3 대 0 패배를 당했다.

한편 위와 같은 한마디 경구(?)가 아니라 좀더 긴 내러티브라도 비슷한 식의 적용에 아무 문제가 없다. 가령 관우가 화웅을 물리치고 술을 먹는 장면.

"자 이 녹차를 마시고 밖으로 나가 열심히 싸워주길 바라오."

"괜찮습니다. 이 녹차는 한웅렬을 물리치고 나서 마시기로 하지요."

박용욱이 그렇게 말한뒤 청룡키보드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모두들 떨떠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밖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누가 이겼는가 모두들 궁금해서 고개를 빼들고 밖을 쳐다보는 찰나 경비병이
목청높게 소리쳤다.

"박용욱이다!!! 박용욱이 이겼다!!!

박용욱이 프로브한마리로 한웅렬 기지를 유린하며 단시간내에게 경기를 마치고
보무도 당당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거침없는 박용욱의 힘찬 뜀박질을 보며
머릿속에 유재석을 떠올리고 있을즈음 박용욱이 안으로 들어와 녹차를 잡았다.

"이제 마시겠습니다."

그리고는 벌컥벌컥 녹차를 들이켰다.
아직 녹차 건더기가 바닥에 가라앉지 않았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1) 박용욱은 초반 프루브 겐세이로 유명한 프로토스 게이머다.

2) 그는 녹차를 좋아한다.

정도이다. 이외에도 "마치 울트라와 아칸이 맞서싸우는 울칸상박의 두사내의 싸움에 모두들 넋을 잃고 지켜보고 있었다."처럼 스타크래프트 유닛만 알고 있으면 이해가 되는 문장도 있고, (-_-;;) 반대로 유닛과 상관없이 프로게이머와 팬덤의 맥락을 알아야 이해되는 문장도 있다. 그중에 가장 웃겼던 것 하나.

"임요환? 그와 나는 물과 기름이요, 피지알과 스갤이요, DDR과 노크소리같은 관계올시다. 임요환이 선뜻 나를 받아줄지 실로 내키지가 않는구려."

여포 역을 맡은 송병석의 대사. 여기서 웃으려면 이러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1) 송병석은 실제로도 임요환과 트러블이 있었다.

2) 피지알(www.pgr21.com)과 스갤(디시인사이드 스타크래프트 갤러리)는 스타리그 팬덤을 구성하는 양대 거점이며, 대단히 사이가 좋지 않다. 피지알은 15줄 이상의 글만 등록이 되는, 긴 글을 추구하는 사이트이며, 스갤은 짤방과 한두줄의 센스로 연명하는, 짧은 글을 추구하는 커뮤니티다. 스갤은 '피지* 문학'을 혐오하며, 피지알은 '무매너 스갤'을 싫어한다.

(참고로 글쓴이인 SEIJI는 드물게 양쪽 모두에 편견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두 개의 사이트에 동시에 연재를 한 적도 있다. 두 사이트의 맥락을 모두 꿰고 있다는 건 그의 글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요인이다.)

3) "DDR과 노크소리"는 그저 생활의 지혜다. -0-;;; (DDR은 프로게이머 서지훈을 가리키는 은어이기도 해서, 다른 뜻이 있을까 고민하느라 순간적으로 독해가 안됐다.)

이런 글들을 읽을 때,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고 스타리그를 본 경력도 일천하며, 결정적으로 아무래도 그들만큼은 푹 빠져있지 못한 나는 '서술자'의 위치에서 '행복한 구경꾼'의 위치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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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26 01:50
수정 아이콘
아시면서...
아케미
05/08/26 07:41
수정 아이콘
세이지님의 글은 센스 그 자체죠^^ 글 잘 읽었습니다. 스타리그는 비록 외국의 게임에서 출발했지만 우리만의 문화가 된 것 같아 참 좋습니다.
조만수
05/08/26 09:32
수정 아이콘
너무 좋은글 입니다. 왜 스타가 단순한 외국산 인기게임으로 생각되면 안되는지에 대한 너무 명쾌한 정리군요..
Milky_way[K]
05/08/26 10:0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봤습니다. ^^
05/08/26 11:00
수정 아이콘
오호... 오랜만에 좋은글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My name is J
05/08/26 12:23
수정 아이콘
이분 같은분들 때문에...이곳도 좋다니까요.. 으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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