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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08/21 17:10:31 |
Name |
DEICIDE |
Subject |
스타크래프트소설 - '그들이 오다' 46~48화 |
2005년 5월 8일 2시 24분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안타까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틈새에, 아가씨는 두손을 꼬옥 모으고 경기를 지켜봤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잘못될까 봐 도저히 경기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가씨는 입술을 깨물고 경기를 지켜봤다.
‘With'
그와 같이 해야했다. 무거운 짐을 지는 것도, 두려운 일을 극복하는 것도. 어렵고 힘든 일을 나누어 하는 것도. 그러면, 그렇게 하다 보면, 좋은 일도, 행복한 일도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아아, 테란! 저그의 언덕 위 입구에 벙커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9드론 발업 저글링의 타이밍을 자로 잰듯이, 8마리째의 저글링이 밖으로 빠져나가자 마자 짓는건데요. 홍진호 선수!!! 벙커 완성되면 정말 힘들어지거든요!!!”
……같이 해요. 제발요. 여기서 끝나지 말아요.
2005년 5월 8일 2시 25분
서울 여의도 본사, MBC 경기장
“아!!!”
진호는 황급히 오버로드를 뺐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오버로드를 잠시 잊고 있었다. 테란의 진영으로 너무 깊숙이 오버로드를 넣어 버린 것이다. 이러다가 가난한 9드론 상황에서 오버로드를 잃기라도 하면……
“……!!!”
바로 그 때, 테란의 SCV들이 쏟아지듯이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순간 진호의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있을 동안, 그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진호는 반사적으로 본진에 크립콜로니 2개를 건설했다.
“아아아아!!! 테란 SCV 모두 데리고 나옵니다! 본진에 크립콜로니 건설하는 홍진호 선수!”
그 때 진호의 저글링이 테란의 본진에 도착했다. 입구를 통과하고 있는 SCV를 두드렸지만, SCV는 저그의 본진 미네랄을 클릭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테란의 본진 위에 올라온 저글링들은 먼저 서플라이를 물어뜯었다.
“타타다다다다!!!”
“홍진호 선수의 저글링! 돌아가지 않고 먼저 서플라이즈 디팟을 두드립니다!”
“아무 소득 없이 회군하긴 늦었다는거죠! 서플라이를 깨뜨리면 테란의 인구수가 막히니 더 이상의 마린 추가생산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건 본진인데요! 마린 움직이나요?”
드디어 숨죽이던 마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7~8기를 헤아리는 숫자였다. SCV 2기를 대동한 마린 병력들이 진호의 크립을 짓밟으며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왔다.
“마린, 마린들이 공격해 들어옵니다!!! 홍진호 선수! 진출한 저글링이 어서 귀환하지 않으면 이거 막아낼 수 없습니다!”
진호의 저글링들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2개의 서플라이 디팟의 체력을 각각 붉은색으로 떨어뜨려 두고 커맨드 센터를 공격했다. 최대한 커맨드 센터에 저글링들을 묶어두고, 들어버리면 그만이었다. 12시와 6시의 섬멀티로 인해 테란이 50의 미네랄만 가지고 있으면 안전하게 부활이 가능한, 기어이 테란의 손을 들어주는 라그나로크였다. 경기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테란이라는 종족과 라그나로크를 저주했다. 아니, 그럴 사이도 없었다.
“홍진호 선수의 저글링과 드론이 크립콜로니를 방어합니다! 해처리 뒤쪽에 추가로 1개의 크립콜로니를 건설하는 홍진호! 이것만 잘 막으면 됩니다, 이것만 잘 막으면!!”
“원해처리라는 상황이 너무 어렵네요. 홍진호!!!”
마린들이 이제 갓 완성된 크립콜로니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금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을 SCV 대부대와 지금 공격하고 있는 마린병력이 합쳐지면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다. 그 이전에 최대한 마린의 숫자를 줄여주어야만 한다.
“두두두두두두……”
“끼가각!!”
“퓨숙! 퓨숙!”
저글링과 드론, SCV와 마린이 벌이는 혈투가 라그나로크 11시 지역을 뒤흔들었다. 두 종족의 기본유닛들이 내는 기계음과 괴성, 파열음, 그리고 비명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웠다.
“파학! 파학!”
“아아악!”
마린들은 필사적으로 산개하며 무리지어 달려드는 드론과 저글링에 맞서 싸웠고, SCV는 그런 마린들을 최대한 보호하며 상대 유닛들을 공격했다. 테란도 싸우지 않을 상황이 아니었다. 본진에서 달려오고 있는 SCV를 기다리거나, 뒤쪽에 지어둔 벙커 라인으로 후퇴할 수도 있었지만, 성큰콜로니가 너무 많이 건설되면 도저히 뚫어낼 방도가 없다. 테란의 유닛들도 사활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촤하학!!!”
성큰으로 변태조차 하지 못하고 크립콜로니 하나가 터져 나갔다. 나머지 하나는 성큰으로 변태 중이었고, 뒤쪽에 건설하고 있는 크립콜로니도 이제 막 완성되었다. SCV로 바리케이트를 친 후, 마린 2~3기가 무빙샷을 하며 저그 유닛들을 쏘아대자 귀중한 저글링과 드론들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파학! 파학! 파학!”
진호도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중이었다. 마린과 SCV들이 다시 건설되어지고 있는 앞쪽의 성큰콜로니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사이, 드론과 저글링이 SCV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마린들을 공격했다. 필사적으로 이렇게 싸워주는 이유는 해처리 뒤쪽에 추가로 건설중인 성큰 콜로니를 안전히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홍진호 선수의 유닛들이 마린들을 둘러쌌습니다! 후퇴하는 마린병력! 마린을 필사적으로 잡아내는 홍진호!”
몇 기의 마린을 잡아내었지만, 배럭스에서 추가되는 마린도 있어서 마린은 아직 5기나 남아 있었다. 또한 전진해서 건설중이었던 성큰 콜로니는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성큰 건설을 취고했고, 붉은 피를 흩뿌리며 터져나가는 성큰을 뒤로하며 두세기 씩 남은 드론과 저글링들이 후퇴했다.
“아아!! SCV 부대가 홍진호 선수의 본진에 도착했습니다! 홍진호 선수의 저글링들, 어서 달려와야죠!!!”
테란의 SCV들이 언덕을 오르는 가운데, 진호의 저글링들이 이제 막 진호의 본진에서 출발하기 시작했다. 노란색 체력의 커맨드센터는 멀뚱히 자신의 본진에 떠 있었다. 여차하면 다시 내려놓고 SCV를 생산하겠다는 것이었고, 저글링 한 기를 두고 가라는 압박이었다. 진호는 어쩔수 없이 7기의 저글링만이 귀환에 나섰다.
2005년 5월 8일 2시 27분
서울시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자원상황, 테란의 자원상황이 어떻게 됩니까?”
김동수 해설의 긴박한 물음에 테란의 자원상황이 곧 표시되었다. 미네랄만 58. SCV 한 기를 생산할 수 있는 자원을 교묘하게 남겨 두었다. 순간 시청앞 광장이 탄식소리로 가득했다.
“홍진호 선수! 아아, 지금 들어가는데요!!!”
아가씨는 두 손을 꼬옥 쥐고, 엄지손가락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그녀의 눈은 차분하게 화면에 멎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란의 병력은 거센 해일과 같이 다시 저그의 크립을 밟고 올라섰다.
“SCV 한부대 되는 병력과 마린 6기!!! 저그의 방어선은 성큰 하나와 드론 세마리, 저글링 넷이 전부입니다!”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은 병력차이였다. 가만히 막고 있자니 성큰이 뚫리고, 성큰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자니 약간의 컨트롤만 하면 병력이 모조리 몰살당할 판이었다. 아가씨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기적’ 이라는 단어 하나 뿐이었다.
“드론과 저글링으로 성큰을 감싸는 홍진호 선수!”
“그렇죠! 무리하게 병력싸움을 해서 잃는 것 보다, 어떻게든 SCV가 성큰에 들러붙는 것을 막고, 성큰으로 마린들을 줄여준다면 지금 달려오는 저글링 7기로 어떻게든 해 볼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하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외계인도 바보는 아니었다. SCV와 마린들은 침착하게 성큰에 들러붙어 있는 저글링과 드론들을 일점사해서 하나씩 잡아주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성큰도 마린들을 공격했지만, 김동수 해설은 천금같은 드론들이 터져나가는 것에 애가 탔다.
“아아, 홍진호 선수!!! 드론은 한기라도 살려야 하는데요! 드론 생산할 자원은 있나요?”
진호의 자원이 곧 표시되었다. 미네랄 107. 코앞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진호는 최대한의 자원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성큰을 보호할 유닛은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 성큰은 마린 3기만을 잡아내고 완전히 SCV에 둘러싸여 버렸다. 진호의 저글링 7기는 그제서야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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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8일 2시 28분
서울 여의도 본사, MBC 경기장
진호의 저글링은 언덕 위로 올라서자 마자, 침착하게 비어있는 벙커부터 파괴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좋은 판단이었지만, 어쨌든 그것도 다 시간이었다. 벙커와 성큰이 거의 동시에 각각 터져나갔다.
“퍼헝!”
“촤학!”
진호의 저글링 7기는 맹렬히 달려들었고, 테란의 SCV 9기와 3기의 마린은 재빨리 진영을 갖추었다. 진호의 저글링들이 미처 틈새를 파고들기도 전에, 마린은 해처리에 밀착하고 SCV들은 그 마린들을 빙 둘러쌌다.
“홍진호 선수의 저글링이 도착했지만, 테란의 컨트롤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글링이 파고들어갈 마땅치가 않은데요!”
진호는 저글링을 아래, 위로 양분해서 틈새를 찾으려 했지만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저글링 한기 한기를 자식처럼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해처리는 계속해서 공격받고 있었다. 해처리에 붙어 있던 마린들과 SCV들이 저글링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해처리를 계속해서 두드리자, 어느새 해처리의 체력은 반 가까이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해설진의 목소리가 안타까움에 젖어들어갔다.
“홍진호 선수, 빈틈을 찾아내 보려 하지만 여의치가 않아요!”
“테란이 마린을 감싸다시피 SCV로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섣부르게 달려드는건 무모합니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해처리의 체력이 줄고 있습니다. 홍진호선수, 결단을 내려야해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있는 진호였다. 저글링으로 이리 저리 빈틈을 찾아보던 진호는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마린과 SCV 곁에 있던 라바 한기가 에그로 변태에 들어가더니, 뒤이어 한기가 더 변태에 들어갔다. 정일훈 캐스터의 목소리가 순간 높아졌다.
“어! 홍진호 선수!!! 라바 2기가 변태에 들어갑니다!”
“아까 있었던 100 약간 넘는 자원을 사용한거죠! 저 중에 적어도 한 기는 드론입니다. 어설프게 50 미네랄만 써서 저글링 뽑아서 공격하다가 막히면 결국 지거든요! 최대한 테란의 화력을 분산시키고, 드론은 후퇴시킨다는 전략입니다!”
모험이었다. 진호는 저글링을 먼저 찍었고, 조금 뒤에 드론을 찍었다. 함께 튀어나오는 순간 SCV와 마린의 대열이 약간은 흐트러질 것이었다. 바로 그 한순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이 방법이 최선이다. 지금 나로서는 말이다.
“끼기기긱…… 끼긱……”
변태에 들어간 에그의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려본 적도 처음이었다. 다들 숨을 죽였다. 중계진도, 경기를 보는 지구인들도, 경기석에 앉은 프로게이머들도, 드론의 에그를 미리 마우스로 찍어놓고 기다리고 있는 진호도.
“챠학!!!”
이윽고, 라바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홍진호의 저글링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탄성과 비명이 뒤섞인 목소리가 경기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예!!!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틈새를 파고드는 저글링! 홍진호 선수 드론 나왔죠! 저 드론 지켜야해요!”
진호는 드론이 터지자마자 미네랄에 찍었다. 순간 저글링과 맞서려던 마린과 SCV의 집중사격이 드론에게 쏟아졌다.
“두두두두!!!!”
“치이익-!”
그러나, 기어이 드론은 테란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경기를 보는 사람들만큼이나 새파랗게 질려 있는 드론이었다. 그러자, 테란의 전 병력이 드론을 좇았다. 직감적으로 마지막 드론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었다.
“드론, 드론 지켜야 합니다 홍진호 선수!!! 드론!!!”
“죽으면 안돼요!!! 아아, SCV가 포위망을 펼칩니다!”
말 그대로 진호의 생명과도 같은 드론이었다. 도망치는 드론, 그 드론에 따라붙는 SCV와 마린. 그리고 그 뒤를 저글링들이 들러붙었다. 테란의 신경이 온통 드론에 팔려 있는 사이 저글링들이 SCV와 마린을 하나씩 줄여가고 있었다.
“키이잉!”
“크아악!”
하지만 테란의 추적 또한 끈질겼다. 미네랄 필드 근처에서 미네랄을 찍으며 도망치는 진호의 드론에게, SCV 또한 같이 미네랄을 클릭하며 공간을 좁혀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SCV들이 포위하듯이 드론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아!!! 홍진호, 안돼요!!! 탈출만 하면 되거든요, 홍진호!!!”
진호는 이를 악물고 빈틈을 찾았다. 단 한곳. 단 한곳에 빈틈이 있었다. 그 곳만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살 수 있다.
‘저기만 지나자. 저기만.’
좁혀드는 몇기 안되는 SCV들의 틈새로, 홍진호의 드론이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 드론을 향해, SCV가 핵융합 절단기를 양쪽에서 들이댔다.
‘제발. 제발 지나가자. 제발. 제발.’
2005년 5월 8일 2시 30분
서울시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아가씨는 기어이 눈을 감았다.
“……툭.”
그리고, 그녀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며, 종이조각 한 개가 땅바닥에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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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8일 2시 30분
서울 여의도 본사, MBC 경기장
진호의 마우스는 움직이고 있지 않았지만, 진호의 저글링들은 열심히 근처에 있는 SCV들을 차례차례 파괴했다. 그러나 자신을 공격하는 저글링들을 향해 SCV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승리자의 여유일까. 찌꺼기만 남은 드론의 사체를 즈려밟으며, SCV는 그렇게 유유하게 폭발해 나갔다.
“기이잉……”
1시 본진에 떠 있는 진호의 오버로드에, 12시 섬멀티로 서서히 날아가는 테란의 커맨드 센터가 보였다. 고이 남겨두었던 58의 미네랄을 안고, 커맨드 센터는 그렇게 안전한 보금자리로 이동해가고 있었다. 서로 전력을 다한 컨트롤을 했지만, SCV라는 유닛은 너무도 강력했다.
“……”
“……”
해설진은 또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옵저버가 쓸쓸한 저그의 본진을 비추었다. 무심하게 꿈틀거리는 라바 위로, 테란의 배럭스 하나가 날아왔다. 저그 본진에 지어둔 배럭스 중 하나를 정찰용으로 띄웠고, 나머지 하나는 12시 지역으로 날려 보냈다. 배럭스는 미동도 없는 저그의 본진 위를 여유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유유히 떠다니는 테란의 건물을 보며 다른 프로게이머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진호…… 진호야.”
요환만 간신히 진호의 이름을 불렀다. 진호의 뒷모습에서, 아까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돌아보던 윤열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
진호는 채팅창에 떨리는 손으로 GG를 써 놓고, 엔터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윤열이 생각났다. 외계인들이 들이밀던 그의 머리가 생각났다. 초점 잃은 눈과 피묻은 창백한 얼굴. 무서웠다. 두려워졌다. 그리고 괴로웠다. 지겹도록 저주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던 2인자, 무관의 제왕, 비운의 사나이라는 말들이 심장을 다시 파고들었다. 요환이 형은 살아남았다는, 그 잔혹한 다행스러움이 진호를 괴롭혔다.
“……”
엔터만 누르면, 바로 죽음이다. 어처구니없게 가혹한 상황이었지만, 깜빡이는 커서는 그를 재촉하는 듯 했다. GG를 치지 않는다면 조금 더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 끝도 내 힘으로 맺는 것이다. 단 하나, 한 사람에게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미안해요.”
진호의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어.”
“탁.”
순간, 진호가 흠칫 했다. 하지만 이미 떨어지고 있던 손은 키보드를 눌렀다.
“어.”
진호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놀라며 그의 손가락이 떨어진 곳은, 엔터 바로 위에 있는 백스페이스였다.
2005년 5월 8일 2시 31분
서울시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자, 잠깐!!!”
김동수 해설의 격앙되어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아가씨가 감았던 눈을 뜬 것도 바로 그 때였다.
“5시…… 5시 지역에 뭔가요?”
옵저버가 그제야 미니맵 상에 일어난 작은 점의 움직임을 포착해 내었다.
“……아아아……”
아가씨도 분명히 그것을 보았다. 진호의 유닛이었다. 옵저버가 그 유닛을 비추자, 친숙하게 그 유닛의 이름을 설명해 주던 진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이 녀석은 드론이라는 녀석이에요.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저그라는 종족 전체가 이 드론 한 마리부터 시작할 수도 있어요.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고,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도 있죠. 어찌 보면 무섭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참 놀라운 일이에요.’
“놀라운 일……”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절망과 죽음의 늪에 휩싸여 있던 시청앞 광장에는, 열광하는 사람들로 인해 폭풍이 휘몰아쳤다.
“아아아아아!!!!!!!! 홍진호!!!!”
“이야아아아!!!!!!!!”
“우와아아아아!!!!”
드론 한 기가 서서히 저그의 본진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정찰을 나갔던 정찰병이었다. 정신없는 전투 상황으로 인해, 5시 지역의 미네랄 옆에 틀어박혀 있던 드론의 존재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스타크래프트 유닛 설명에 단세포 생물이라는 드론이지만, 지금은 전 인류를 구해낼 수 있는 천금보다 귀한 존재였다.
“아아, 저그가, 저그가!!!!!!!”
김동수 해설도, 정일훈 캐스터도 완전히 흥분에 도취되어버렸다. 정일훈 캐스터는 쉰 목소리가 튀어나오든 말든 악을 지르듯이 저그 종족을 연신 외쳐댔다. 그리고 커다랗게 소리질렀다.
“저그가, 홍진호를 배신하지 않는거에요!!!!!!!!!”
2005년 5월 8일 2시 45분
서울시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양 종족은 일꾼을 한기 한기 늘려가며 서서히 살아났지만, 결정적으로 진호에게는 발업 이후에도 계속 캐던 100 가까운 개스가 있었다. 결국 빠르게 레어를 올린 진호는 뮤탈리스크로 완전히 테란의 유닛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틀어막아 버렸다. 테란은 서플라이를 지을 공간이 협소하여 일정 수준 이상을 발전하지 못하였고, 진호는 차례차례 멀티를 늘려갔다.
“홍진호 선수의 가디언이 공격에 들어갑니다!!!”
가디언 한부대 정도가 테란의 본진으로 꿈틀거리며 다가갔다. 저그가 최종테크트리에 다다랐지만, 테란은 뮤탈리스크의 방어로 인해 벙커와 터렛을 잔뜩 지어둔 탓에, 건물을 지을 공간이 너무도 부족하여 테크트리를 제대로 올릴 수가 없었다. 가디언을 상대할 유닛이라고는 레이스 두세기가 전부였다.
“펑, 펑, 펑, 펑!”
레이스와 터렛에 맞으면서도, 가디언들은 커맨드 센터를 일점사했다. 산덩어리들이 작렬하자 커맨드 센터의 체력은 급속히 떨어졌다. SCV들이 황급히 커맨드 센터를 수리하러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가디언 뒤쪽에서 날아오는 유닛들이 빨랐다.
“아아, 퀸!!!”
해설자들의 감탄을 힘입으며, 퀸 4기가 테란의 중심부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머지 퀸은 모두 산화했지만, 퀸 한기가 성공적으로 체력이 줄어든 커맨드 센터 내부로 침입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커맨드 센터 전체가 생체화되었다.
“키이잉-!”
꿈틀거리는 인페스티드 커맨드 센터가 하늘로 리프트되었다. 저그의 건물 중에 유일하게 날아다니는 건물이었다. 그 주위에 있던 테란의 미사일 터렛들은, 한때 자신의 센터 건물이었던 육중한 생체건물에게 일제히 미사일을 날렸다.
“퍼펑!!”
“삐빗-”
커맨드 센터가 터지는 동시에,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3경기만에 처음으로 나오는 항복선언이었다.
<3 : GG>
“이야아아!!!!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이야아아아!!!”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두 손을 내지르며, 박수를 치며 진호의 승리를 기뻐했다. 2승째다. 이제 1승만 더하면 된다. 벅찬 희망에 부풀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아가씨 또한 박수를 치며 화면 속의 진호를 응시했다. 진호는 헤드셋을 벗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신을 비추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아가씨는 대형 화면 속의 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호는 옷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모자였다. 진호는 깊숙이 그것을 눌러썼다.
“……풋.”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가시는 풋 하고 물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 옆으로 기쁨으로 반짝이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화면 속의 진호도 씨익 웃으며, 승리의 V자를 그렸다. 진호는 굉장히 오랜만에, 그렇게 마음놓고 웃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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