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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08/18 01:34:14 |
Name |
DEICIDE |
Subject |
스타크래프트소설 - '그들이 오다' 13~15화 |
2005년 5월 7일 11시 40분
서울 여의도 MBC 본사
프로게이머 임요환의 출격으로 한창 들떠있던 분위기도 잠시, 외계인이 MBC 본사의 직원들에게 대결 장소와 장비 및 진행 등을 전달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대결 장소는 바로 이 곳이다.”
외계인들은 MBC 스튜디오를 대결 장소로 정했다. 가장 그들에게 익숙하고, 또 통제 가능한 곳이기에 어느정도 대결 장소로 예상되어진 곳이었다.
“사용되어질 컴퓨터는 우리 측에서 준비한다. 너희 인간들의 조잡한 컴퓨터는 믿을 수 없다. 시스템 문제의 가능성이 전혀 없고, 너희들도 익숙할 그런 컴퓨터를 준비해 두었다. 경기 스튜디오 내에는 우리측 선수 다섯, 인간측 선수 다섯이 입장되며, 처형을 담당할 우리측 외계인 둘이 입회한다.”
처형 대목에 직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 어느 누구도 경기에 개입할 수 없으며, 만약 사소하게 의심되는 부분이라도 발견되었을 시, 경기하는 그 자는 즉시 패전처리해서 죽여버리겠다. 경기장 내의 모습 촬영, 경기 내용 옵저버 등은 우리가 담당한다. 덜떨어진 인간들의 영상편집기술에 이런 것을 맡길 수야 없지.”
그럼 대체 무엇을 하면 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마자 외계인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가 할 것은 너희 종족의 모습을 성실하게 중계하는 것 뿐이지. 전 세계로 인류의 패배와 절망을 잘 중계하는 거다. 단 하나의 희망에 목숨걸고 버둥거리는 너희 교만한 인간 족속들이 절망하며 죽어 나가는 모습이 기대되어 견딜 수 없군. 말해 두지만, 우리는 종족들을 절멸시킬 때 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해 왔다. 그리고 단 한번도 우리가 대결에서 져본 일이 없다. 살아 남은 족속들이 없다는 거지. 너희 인간들은 과연 살아날 수 있을지 기대해보겠다.”
외계인의 말이 끝났다. 열심히 여러 가지를 받아 적고 있었던 PD는, 잠시 자기가 쓴 것을 내려다보고 있더니, 그 종이를 꾸깃 하고 구겨버렸다. 그리고 옆의 김동수 해설을 바라보았다.
“가장 큰 일을 맡게 되셨습니다.”
“그러게요.”
김동수 해설은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같으면 머쓱해서 했을 행동이지만, 지금 머리를 긁적이는 김동수 해설의 모습은 머리를 쥐어 뜯는다는 표현이 가까울 정도로, 깊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중계해야 할까요?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 볼 텐데, 그들 중에는 스타크래프트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생각해서, 이미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설명하는 방송을 여러 차례 내보냈습니다. 물론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김동수 해설께서는 평소 하시던 대로, 그렇게 경기를 중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혼자 중계하게 되는 겁니까? 다른 해설진이나 캐스터분들은 여전히 섭외가 되지 않고 있나요?”
그러자 PD가 씩 웃었다.
“아닙니다. 긴급히 한 분을 섭외했습니다.”
“그게 누구시죠?”
“예전에 온게임넷 스타크래프트 중계 캐스터를 맡으시던 분이십니다. 김동수 해설도 아마 잘 알고 계실텐데요.”
그러자 동수가 놀라 물었다.
“정일훈…… 정일훈 캐스터 말씀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현재 각 방송사 스타크래프트 중계 캐스터분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섭외가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우연히도 정일훈 캐스터와 연락이 가능했고, 고민하시다가 결정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십니다.”
동수는 큰 부담을 덜었다고 생각했다. 혼자라면 너무 어렵지만, 노련한 정일훈 캐스터와 함께라면, 부담스러운 이런 상황에서라도 스타크래프트 중계를 잘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전 인류의 운명보다 방송 중계를 걱정하고 있던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 정도로 프로 의식이 내게 자리잡힌 것일까 하면서 스스로에게 놀라면서도, 다시금 밀려들어오는 압박과 공포에 깊은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는 김동수 해설이었다.
2005년 5월 17일 11시 55분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시청앞 서울광장 임시진료소
“이쪽으로 눕히세요.”
한 간호사가 이동용 침대 시트를 정리해 주면서 청년을 안내했다. 간호사는 땀에 흠뻑 젖어 있고, 여기 저기에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와중에서도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고 몇 번이고 돌보아 주었다. 참 열심인 간호사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저, 저는 부상이 대단치 않아서 침대에 누울 필요는 없는데요.”
“괜찮아요. 이곳에 부상자가 많은 만큼 의료기기가 집중되고 있어서, 부족한 상태는 아닙니다. 어서 누우세요. 발목 이외의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아가씨가 사양하자, 간호사가 괜찮다며 청년을 도와 아가씨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
“아니요, 다른 데는 없습니다.”
“예, 다행이네요. 환자분 보호자 되시나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고요?”
“아, 보호자는 아니고…… 다친 데 없습니다.”
“그러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선생님께서 오실테니 기다려 주시고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세요. 냉찜질팩이 남아있으면 가져올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간호사는 또다시 뛰어갔다. 아가씨가 그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분 참 친절하시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예. 그렇네요.”
“당신도 참 친절하세요. 정말 고마워요.”
“아니오, 무슨 말씀이세요.”
청년이 정색을 하자, 아가씨가 말렸다.
“아니에요. 정말 감사해요. 아까 그렇게 저 도와주신다는 것도 잊고 화낸 것 죄송해요.”
“정말 아닙니다.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런 말씀 왜 하세요. 그리고 말씀 낮추세요. 조심하셔야죠.”
청년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기색이 보이자,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라 말렸다. 청년은 그런 아가씨가 무척 고마웠고, 또 귀엽게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찬찬히 뜯어보니 꽤나 미인이었다.
“왜요?”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좀 길어진다싶자, 아가씨가 조금 민망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전 이만 가봐야 겠네요.”
“가다니, 어디로요? ……아얏!”
누워 있던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다 부은 발목의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조심하세요, 누워 계세요.”
“가신다고요? 지금이요?”
“예. 약속 지키러요.”
그제야 아가씨는 청년이 두 번째 약속을 말하다가 말았던 것이 생각났다.
“아, 맞다. 두 번째 약속. 그게 뭔데요? 누구를 만나기로 하셨나요? 누군데요?”
“누굴 만나기로 한건 아니지만, 누구 때문이기는 하죠.”
그러면서 청년은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청년이 가리킨 것은 전광판이었다.
“누…… 누구……? 임요환 선수요?”
아가씨가 묻자, 청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 사람이 출전 명단에 오른다면, 나도 함께 출전하겠다는게 제가 했던 두 번째 약속이에요.”
“그…… 그런!”
아가씨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한 질문은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전혀 엉뚱한 질문이었다.
“만약에…… 임요환 선수가…… 맨 마지막으로 출전했다면요?”
“훗, 그 생각도 해봤죠. 은근히 출전 안하기를 바라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제 자신을 속이거나 할 수 없네요. 누가 저를 부르기 전에, 제 자신이 저를 부르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청년이 모자를 벗었다. 아가씨는 처음으로 청년의 얼굴을 밝게 볼 수 있었다.
“이름이…… 뭐에요?”
아가씨가 힘없이 물었다. 선량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프로 게이머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인가. 나와 다를 것 없는 그저 평범한 젊은이일 뿐인데.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데.
“제 이름이요? 음, 지난번에 제가 만들어드린 아이디 있죠?”
“예. 여기 가지고 있어요.”
아가씨는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었다. 꼬깃꼬깃 접혀 있었지만, 아직도 Black-Gean 이라는 글씨는 선명했다.
“이걸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어요?”
“예……”
청년은 그것을 건네받고서는, 또 한번 씩 웃었다. 하지만, 웬지 그 미소를 본 아가씨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청년은 펜을 꺼내들더니, 거기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종이를 접었다.
“제 이름은 경기할 때 알려 드릴게요.”
“왜, 왜요?”
“제가 반드시 경기에 나가겠다는, 아가씨와의 하나의 약속이죠.”
그러면서 청년은 종이쪽지를 아가씨에게 건넸다. 아가씨는 그것을 받아들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청년의 두 눈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볼 뿐이었다.
“또 보게 되길 바랄게요. 안녕히 계세요.”
청년은 그 쪽지를 아가씨의 손에 쥐어주고, 뛰어 나갔다. 그리고서는 아가씨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갔다. 아가씨는 멍하니 뛰어가고 있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손에 있는 종이쪽지가 생각났다. 아가씨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펴 보았다.
“이게…… 뭐지?”
종이쪽지에는 청년이 작은 글씨로 ‘Good Luck' 이라고 더 적어 놓았고, 중간의 알파벳 G를 B로 바꾸어 놓았다. 그게 전부였다.
<Good luck, Black-Bean>
아가씨는 그 알 수 없는 종이쪽지를 손에 쥔 채, 다시 청년이 사라져버린 곳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뛰어가던 그 청년의 뒷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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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7일 오후 1시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강민은 조금 당황해했다. 잠깐 들르려고 했던 프로게이머 숙소에 그만 발이 묶여버리고 만 것이다. 폭동 사태 이후, 외계인들은 프로게이머들을 T1 숙소에 구금하고, 모든 외출을 통제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민은 여러 프로게이머들의 얼굴을 보니, 끈끈한 동료애와 함께 미안함이 엄습해왔다.
“어떻게 하냐, 민아. 부모님께 가봐야 할텐데……”
“아니야, 괜찮아. 사실 돌아갈 교통편도 불확실했고, 이렇게 너희들 보니까 더 좋다.”
김정민이 걱정스레 묻자, 강민이 손을 내저었다. 꽤 긴 시간을 한솥밥을 먹었던 두 선수였다. 현재, 살아있는게 확인되었던 GO팀 출신 프로게이머는 김정민, 강민, 박태민, 전상욱 넷뿐이었다. 이 중 전상욱은 이벤트로 인해 먼 지방에 내려가 있는 와중에 사태가 터졌고, 서울로 귀환하고 있는 중 오늘 아침부터 연락이 두절되고 있었다. 때문에 현재 T1 숙소에는 김정민, 강민, 박태민이 있었고, 이 중에서 박태민과 강민은 각각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므로 건강한 선수는 김정민 한 사람 뿐이었다. 팀 전체가 살해당한 참극도 참극이었지만, GO팀의 기구한 불운은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용호는 좀 어때?”
요환이 물어왔다. 출전 결정 후 연습실에 줄곧 있다가 강민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온 그였다. 강민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애가 성격이 순해서…… 아직까지는 괜찮아 보이는데 정신적 충격이 큰가봐.”
“민이 너는? 다른덴 이상있는 데 없고?”
요환이 이어서 묻자, 강민은 자신의 왼손가락을 내려다보며 표정이 우울하게 바뀌었다.
“이것 뿐이야. 나는 며칠만 있으면 낫게 될, 손가락이 삔 게 다인데…… 다들 너무 미안해.”
“무슨 말이야. 네가 왜 사과를 해. 네가 다치고 싶어서 다쳤냐.”
“아냐. 누군가 쓴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어. 자기 몸 관리하는 것도 선수의 책임이라고. 내 몸 관리 안해서 내가 다친건 내 잘못이지.”
“아니다, 야. 그건…… 아픈게 왜 네 탓이냐.”
요환이 강민을 달래자, 강민이 씩 하고 미소지었다.
“고마워, 요환형. 근데 정민아, 정석이랑 진호는?”
“……어?”
갑자기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은 정민은 난감해했다. 정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어…… 어. 정석이는, 출전했잖아. 그래서 지금 위에 연습실에서 윤열이하고 같이 둘이서 연습중이고……”
“응.”
“그리고 진호는…… 그러니깐……”
정민은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옆에 있는 변길섭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길섭도 정민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정민이 무엇인가 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
“쿵쿵쿵!”
누군가 연습실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모두들 화들짝 놀랐다.
“쿵쿵쿵쿵쿵쿵-!”
그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요환이 벌떡 일어나서, 현관으로 다가가서는 물었다.
“누구십니까?”
“헉, 헉…… 나야 나.”
이 목소리는……? 요환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너……!”
그 곳에는 숨을 헉헉대며 한쪽 팔을 벽에 기대고 홍진호가 서 있었다. 진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요환의 얼굴을 보자,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중나온 사람도 이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참 인생 재밌다는 생각을 한 진호였다.
“누구야?”
“진호냐? 홍진호?”
프로게이머들이 하나 둘 현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진호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다들 놀라서 제자리에 멈추었다. 진호는 그들의 얼굴을 한번 슥 돌아보았다.
“미안해.”
진호가 벽에 기대었던 팔을 내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요환이 진호의 어깨를 잡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야! 얼마나 기다렸는줄 아냐. 어디갔다가 이제오냐!……”
요환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진호는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다가, 곧 자기도 요환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형……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됐어, 이녀석아. 괜찮어……”
요환은 진호의 등을 토닥였고,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주위 게이머들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말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안아주고 있는 모습이란 정말 멋지고 가슴아픈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진호가 요환을 불렀다.
“근데 형.”
“응?”
그러더니, 진호는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한번 푹 쉬었다.
“……형이랑 나도 참 어지간한 것 같아.”
2005년 5월 7일 오후 2시
잠실종합병원 병실
용호는 병원에서 제공된 치료식을 먹고 있었다. 헌데 왼손으로 먹으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반찬을 젓가락으로 찔러 먹거나, 숟가락으로 떠 먹고 있는 중이었다. 용호는 되도록 잘린 팔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럴 때에는 순간순간 치밀어 오는 감정을 자제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탁.”
“휴……”
용호는 절반도 채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 놓았다. 입맛도 없었고,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자, 병실을 돌보고 있던 한 간호사가 용호에게 다가왔다.
“조용호님, 왜 더 드시지 않으세요?”
“아, 예…… 밥 먹기가 힘드네요. 입맛도 없고요.”
“그래도 드셔야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됐어요.”
“조용호님, 이럴 때일수록 먹고 기운을 차리셔야 해요.”
용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씩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충분히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회복이 늦어요. 어서 드시고……”
“아, 됐다니까요!!!”
“와장창창!”
“어머나!”
순간, 용호가 버럭 화를 내면서 식판을 엎어버렸다.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식판이 바닥에 굴렀고, 깜짝 놀란 간호사가 뒤로 물러섰다. 용호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가만히좀 내버려둬요…… 가만히좀……”
용호는 두 눈을 꼭 감고 숨을 골랐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가 잘못한 것은 없었는데. 그 때, 간호사가 용호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조용호님.”
"아, 아니에요. 제가 신경이 날카로워서…… 죄송합니다.“
“금방 치워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 그게……”
그 때, 무안해하며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난감해하던 용호의 눈이 TV에 멎었다. TV에는 대담 프로그램같은 것이 방송되고 있었는데, 오른쪽 아래에 항상 떠 있던 선수명단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선수가 추가되었다는 뜻이었다.
“……저게……”
TV가 먼 곳에 있었기에, 용호는 잘 보이지 않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눈을 가늘게 떴지만 아직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선수명단이 확 커지면서 화면 전체로 확대되었다.
"......!!"
숫자 4. 옆에 반짝이는 아이디가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4. [NC]...YellOw>
용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폭풍저그 홍진호가 저그의 첫 출전선수이자, 네 번째 선수였다. 제한시간까지는 채 8시간을 남겨두지 못한 지금, 선수 리스트는 단 한 개의 빈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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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7일 오후 3시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아니, 그게 정말이야?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해! 언제 그랬는데?”
송호창 감독이 크게 소리쳤다. 윤열은 그 앞에 서서,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숙인채 말없이 있었다.
“송감독, 무슨 일입니까? 왜 이윤열 선수에게 그렇게 화를 내세요.”
주훈 감독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송감독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아 글쎄, 윤열이 이녀석이 마우스하고 키보드를 잃어버렸답니다.”
“예!?”
“나, 이거 참. 휴…… 이걸 어떻게 하지요?”
회의실 안에 있는 감독들은 일제히 놀랐다. 출전 선수인 이윤열이 마우스와 키보드를 놓고 왔다니. 다들 얼이 빠져 있을 때, 이재균 감독이 다가와서는 이윤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야기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봐요, 송감독. 윤열이 더 이상 다그치지는 맙시다.”
“속이 답답하니까 그렇지요. 아니, 윤열아. 너는 너 키보드랑 마우스도 없으면서 어떻게 출전할 생각을……”
“송감독!”
이재균 감독이 송호창 감독을 제지시켰다.
“뭐요? 윤열이는 내 선수입니다. 이감독이 왜 나서는겁니까?”
“지금 상황에서 내 선수 네 선수가 어딨습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시오? 이감독?”
“그러니까 그만 합시다.”
그러자, 송호창 감독은 식식거리면서 문을 쾅 닫고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이재균 감독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윤열에게 물었다.
“윤열아,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그걸 언제 잃어버렸는데?”
“……그저께…… 아니, 5월 4일인 것 같아요.”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알겠어?”
“그날 서바이버 리그가 있었는데…… 팀원들 경기도 구경하고 만날 사람도 있어서 세중에 갔었어요. 그런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키보드랑 마우스를 넣어둔 가방이 없어졌어요.”
이재균 감독은 얼이 빠졌다. 잃어버린게 아니고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찾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구나.”
“죄송합니다. 정말……”
윤열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책하는 윤열을 보자, 이재균 감독은 그것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윤열이 마음졸이고 있었을지 생각이 되어 가슴이 아팠다. 이재균 감독은 윤열의 등 뒤로 돌아가서, 윤열의 어깨를 양 손으로 덥석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어깨 펴 이녀석아. 훌륭한 목수는 어떤 연장으로도 나무를 잘 베어내야지.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연습해서 적응하면 되지. 응?”
“예……”
“그래. 어이, 주훈감독. 숙소에 윤열이가 쓸 만한 키보드와 마우스 있습니까?”
이재균 감독이 묻자 주훈감독이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그, 그래. 이윤열 선수. 어떤 마우스하고 키보드가 필요한가?”
2005년 5월 7일 오후 3시 15분
서울특별시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준비는 다 끝났나?”
“예.”
키가 크고 화려한 옷을 입은 외계인이 묻자, 그 뒤에 서 있던 외계인이 깍듯이 대답했다.
“이 짓도 슬슬 질려가는군.”
“그러십니까.”
키가 큰 외계인이 조용히 그르렁댄 후,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재미있었으면 좋겠군.”
“재미있으실 겁니다.”
“그래? 어떻게 확신하나?”
“이 인간이라는 종족의 스타크래프트를 수행하는 능력이란 굉장한 수준입니다. 선발되고 선발된 우리의 최고 전사들이지만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그러면서, 키큰 외계인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금속제 통 안에 점액질의 액체가 꾸물거렸고, 그 안에 고치 같은 것이 번들거리며 들어 있었다.
“참. 저것도 있었군.”
“예, 사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럼 재미있겠군.”
“예. 재미있으실 겁니다.”
키큰 외계인은 고개를 들었다. 한때 숱한 아파트단지와 빌딩이 서 있었던 한강시민공원 주변은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어 흉물스러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외계인의 뒤와 머리 위의 하늘에는 거대한 UFO 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떠 있었다.
2005년 5월 7일 오후 3시 30분
서울특별시 삼성동
중학생쯤 될 만한 소녀가 빼꼼히 골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쩌지…… 진짜.”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소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 소녀는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T1 숙소가 앞에 보였고, 그 주위를 무시무시한 외계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떡하지…… 아……”
울상이 된 소녀 곁에는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윤열의 키보드와 마우스가 들어 있었다. 사흘 전, 이 소녀는 세중게임월드에 놀러갔다. 그러다 우연히 이윤열 선수를 보게 되었다. 이 소녀는 자다가도 이윤열 선수 꿈을 꿀 정도로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쑥스러움이 많아서 다가가 말도 걸지 못하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이윤열 선수가 경기장 구석 후미진 곳에 가방을 놓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순간,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주워들고 재빨리 도망쳐 버린 것이다.
“아, 진짜 내가 왜그랬지……”
소녀는 일이 이렇게 커져버릴 줄은 몰랐다. 처음엔 아무도 모르게 가방을 버리려고 했는데, 때마침 이윤열 선수가 가장 첫 선수로 출전했다. 소녀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조아라, 정신차려. 용기를 내자.”
‘아라’ 라고 자기를 부른 소녀는 자신의 볼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 소녀의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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