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이글루에 썼던 글을 그대로 옮겨온 탓에 부득이 반말투가 되어버린 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한 번 밖에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개인적인 차원의 감상정리와, 이번 작품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은 점에 대한 나름의 변호로서 이 글을 적음을 밝힌다. 먼저 고질적인 문학사상사의 번역문제에 대해서는 제쳐놓기로 하자. 최근 94년 신세대에서 나온 오에 겐자부로의 '절규'를 읽고 있는데, 그리 비범한 문장이 아님에도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2번, 3번 문장을 되새겨야 하는 이 책보다야 양호한 편이 아닌가. 정말이지 번역된 문장 탓을 하며 책 읽기를 멈추는 경우는 또 오랜만이지 싶다.
가격의 경우에도 신통치는 않으나 하드커버인 점을 감안하면 최근 출판계의 동향에 비해서는 그나마 양심적인 축에 속하는 가격이 아닌가 싶다. 허나 유심히 책 전체의 볼륨을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내 경우엔 어떤 책의 경우에도 후기는 읽지 않으니 30페이지에 달하는 후기가 차지하는 비율만 해도 그리 달갑지 않다. 뭐, 최근엔 하드커버로 재출간되는 책들이 그 덩치만 부풀리는 경우가 속출하는데 아무래도 곱게만 봐줄수도 없는 일이다.(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의 경우엔 일부러 하드커버를 구입하지 않았는데, 바뀐 표지 디자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가볍게 소설 내부적인 이야기에 손대보자.
새벽의 리얼리티
이것은 하루키 나름의 솔직하고 공감이 가는 통찰력이다. 최근 하루키의 소설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메타포 위주로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많아졌지만, 이러한 설정은 꾸밈없는 직구라고 할까, 오히려 참신하고 솔직하게 다가온다. '어둠의 저편'에서 그려지는 새벽의 세계는 낯설지 않다. 비춰주는 시야 자체가 기울어져 있지 않다. 이것은 하루키가 1인칭을 벗어나며 얻은 힘으로도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거기에 하루키 특유의 우화가 간섭하기 시작한다. 일상 속에서 비일상의 경계가 드러나는 것은 하루키의 작품 간에 거의 절대적으로 호환 가능한 코드라 하겠지만, 여기에는 과거 1인칭 시점 때와 같은 억지력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에는 '기능인'이 존재치 않는다. 하루키는 철저하게 간섭하지 않으며 '다만 볼 뿐인' 관찰자를 상정하고 있다. 과거 쥐 3부작을 시작으로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벽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거기에 도움닫기를 해줄 수 있는 기능인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태엽 감는 새'에서는 우물과 야구 방망이, 그리고 많은 만남, 긴 사색이 필요했듯 벽을 넘기 위해서는 수많은 필요와 당위가 접점으로 만나야만 한다.
거기에는 '벽을 뛰어넘을' 필요가 존재했다. 하지만 얼마 전 하루키의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이와 같은 내부적 요구는 작가로서의 하루키 내부에서 이미 어느 정도 해소의 단계에 이른 듯 하다. 그는 이제 '벽을 뛰어넘는' 것이 필요이자 목적이었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여성의 재고찰
그간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의 주인공은 남성이었다. 그건 그가 오랜 기간 1인칭의 시점을 활용해온 탓이 크다 할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1인칭을 벗어나 3인칭의 화자로 전이되었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와 '해변의 카프카'는 나름대로 이번 '어둠의 저편'과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기본적으로 하루키는 매력적인 여성을 꿈꾸며 그런 여성상을 작품으로 투영코자 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의 작품 속의 여성성의 문제는 1인칭의 남성에 의해 추구되어지며 어떤 의미로 상실되어진 것으로서 전락하고 만다. 앞서에 짚어본 바대로 이것은 하루키의 '벽 넘기'에 필수불가결한 사전 요소이자 필연의 요구가 되지만 1인칭 남성이 벽을 넘었다고 해서 결코 그 본래성으로 다시금 완벽하게 회귀하거나 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하루키 소설에 '섹스'의 문제가 은연중에 동반되어 있으며 그것으로 기본적으로 어떤 해결 상태에 이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에 비하여 3인칭의 세계로 나아간 하루키는 새롭게 여성의 눈과 몸을 거치기 시작한 듯 하다. 글쎄, 내 경우엔 아직은 잘 알 수 없다. 이번 작품은 차분히 뜸을 들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뭔가의 내부적 변화를 기대케 하는 텀이다.
대극의 문제
대극의 문제 역시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대조적인 두 여성 나오코와 미도리가 등장했다면, 이들은 주인공을 매개로 한 ‘Pseudo-Couples'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은 하루키가 그의 이상형처럼 제시한 '1973년의 핀볼'에 등장하는 쌍둥이 자매 208,209로부터 발달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번 작품에서는 정반대 성격의 자매를 통해서 재현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그 자신을 투영한 두 명의 대극된 노인을 바탕으로 시대의 광기와 절망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극의 대단원에 이르려 함을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은 하루키에게 있어서도 그간 '이쪽'과 '벽 너머의 저쪽'이라고 하는 대극을 통해 줄곧 심화를 거듭해 왔다.
그것은 어설픈 화해와 화합보다도 대극된 두 힘 사이에서 유발되는 긴장상태를 심화시켜 나가는 것이 소설 본연의 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며, 소설가의 끊임없는 유랑의 걸음을 촉발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새로운 세계로 전향해 온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일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있어서 대극의 문제까지도 종료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실재하는 대극을 포착하고 있으며 작품을 통해 그 자신의 긴장상태를 심화해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끝으로
아무래도 본 책을 날림으로 읽은 덕에 신통찮은 감상이 되어버렸지만, 하루키 나름의 변화의 가능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나는 아무래도 조금 더 텀을 두고 앞으로의 그의 변모에 좀 더 관심이 간다. 그의 전향은 나로서도 오랫 동안 바래마지 않던 바고 그 긴장된 걸음걸이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두근두근하다.
덧. Pgr에는 오랜만에 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절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pgr같은 곳에 글 쓰는 일은 두근두근한 일이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덧2. 서평이라 하기 어려운 가벼운 감상입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다시 읽고 감상을 정리해야 할 듯 합니다. 약간의 참고용으로만 봐주십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