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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18 11:07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그분들에게 자식에 생사라도 전해지도록 모두가 노력했으면....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__)
05/05/18 11:12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그 자식은 지금도 밥잘먹고 사는데...
세상은 참 더럽고 치사합니다. 그래도 살만한 것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분들의 노력 때문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__)
05/05/18 11:19
지금 우리들을 이렇게 자유와 민주주의 속에 살수 있는 밑거름을 피과 살
로 다져주신 광주 시민들의 희생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 아직도 그들에게 집압명령을 내린 인간 쓰레기 들은 한국의 장성으로 명 예롭게 전역하고 한국의 전 대통령으로 대접받으며 호화롭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과거 일제시대의 친일 세력들이 왜 아직도 큰소리치며 살고 있는지 이해가 갑니다. 불과 25년전의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한국 의 지도층 이라는 작자들의 행태에 한숨이 나옵니다.
05/05/18 11:20
'진상 규명' 쉽게 쓸 수 있는 말이지만,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하죠. 언젠가는 완전히 진상이 밝혀지고,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__)
05/05/18 11:36
DAUM 아고라의 강풀님 5.18카툰 링크입니다..
http://agorabbs3.media.daum.net/griffin/do/kin/read?bbsId=K151&articleId=2242&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 숙연해지네요..
05/05/18 11:52
"5월 광주는 달력 속에 기념일로 오지 않고 언제나 후회와 부끄러움속에 참회의 거울로 왔다. 그러기를 25년째다. '산자여 따르라'던 그 피맺힌 함성이 완전히 진혼(鎭魂)되지 않는 한 5월의 넋에 대한 죄스러움과 부채의식조차 사치일 뿐 그저 가슴 미어지는 침묵만이 오히려 진실일 뿐이다."
임종석 의원의 말입니다. 임의원에 대해 지지하는 쪽이든 그렇지 않든, 한 번쯤 80년 광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곱씹어봄직한 말인듯...
05/05/18 12:05
이놈의 과거사 청산문제가 왜이리 지지부진한지. 정말 답답하네요.
하루빨리 과거사가 진실되게 규명되어 5.18 희생자들의 영령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줬으면 합니다.
05/05/18 12:47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5.18 잊혀질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 세대들에서 이런 사건을 어떻게 해보자 이거는 아닙니다만 " 우린 5.18 사건" 을 알고있다. 결코 잊지 못한다. 이것만은 다들 생각해주셧으면 합니다.
05/05/18 13:00
우리는 알고도 묵인하는것 아닙니까? 5.18의 가치는 역사에 넘길수 밖에 없다는것을 그진실은 어떻게 챃아야 할지 ...아직도 이땅에는 광주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광주사태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민들을 폭도로 그들의 학살을 구국의 결단으로 믿고있는 바로 우리같은 국민이 결코적지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분들의 가치와 신념에는 광주항쟁은 나라를 뒤흔든 폭동사태일뿐입니다. 한하늘 한땅아래 극과극을 달리는 이 시간과 의식이 있는이상 그날의 의미를 어떻게 이어갈수 있을런지....단하나 그렇게 돌아가신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어느나라 누구도 인정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됬다는 거지요 결코 거저 얻은것이 아닌
05/05/18 13:11
저는 광주 사람인데도 오늘 아침에 시험이 있어서
정신 없이 공부했었습니다. 4교시 수업을 끝내기 전에 교수님께서 5.18에 대한 말씀을 꺼내시더라구요.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바르게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저부터도 관심을 가져야겠구요.
05/05/18 13:16
전 광주에서 태어났고, 지금껏 광주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적... 가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해주는 옛날 이야기 속에 일제시대와 6.25전쟁... 그리고 광주 5.18이야기는 지금껏 밝혀진 사실보다 더욱 처참하고 비극적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5.18사태라고하면 '폭동 진압'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무리들이 고개를 떳떳히 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 3시절 저희 사회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광주 5.18... 이거는 대한민국 역사상 진짜 허벌라게 중요한 문제이지만...수능에는 안 나온다. 왜냐면 현재 국가 고위공무직에 앉아있는 것들은 5.18이 영원히 폭동진압으로 기억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 잊지는 말아라. 시험에 안나온다고 해서 이거 잊어버리면 대한민국 민주주의 망하는거다!' 아무리 감춘다고 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광주 5.18은 '폭동' 이 아니라 '민주항쟁' 이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돌아가신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05/05/18 13:21
쫌 길지만 이거 한 번 읽어 보세요
다음 토론방에 올라와 있더군요 25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이경남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다.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구체적으로는 게*릴라 침*투나 사회 소*요에 대비한 훈련)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 경이었는데, 다음 달 10월에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12 · 12 사*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시*해 사건이 있고 난 후 전*쟁 경계령인 데프콘Ⅲ가 발동되자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공수여단에서 근무하던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긴장된 군생활을 해야 했다. 더구나 12· 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의지가 드러나면서 일어난 1980년 봄의 수많은 소*요와 혼*란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될 공수 요원들의 생활과 훈련을 한없이 고달프게 만들었다. . 게다가 정신 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에 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모두 좌*경 용*공 분*자들이라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서슴지 않게 한 심리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1979년 12월 30일 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낙하)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의 봉급과 500%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 일병이었던 나도 그 이야기를 믿고 나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터이다. 그러다 강원도 화천에 있던 우리 여단이 서울로 대대적인 부대 이동을 한 것은 1980년 5월 초 무렵으로 기억된다. 이는 잠시 시위 진*압을 하기 위해 출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기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한 출발이었다. 매년 7, 8월이 되면 공수 부대 원들은 바닷가로 나가 몇 주씩 수영 교육을 받는데. 봄에 부대를 옮기면서 수영 교육준비까지 하고 가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는 시*위를 진*압하고는 부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비상 계엄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산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가? 5월이 되자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다.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 강사는 부마 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단호하게 시*위를 진*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여단이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5시 경이었다. 새벽 2시경에 도착해 보니 광주였고,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선대학교였다. 거기에는 이미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피로에 지친 우리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3, 4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 아침 식사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급히 단독 군장을 하고 총*검을 꽂고 군용트럭에 탑승하여 소위 무*력 시*위라는 것을 하여야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라북도 금마에 있던 한 공수여단이 어제 광주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었고, 이에 강경하게 맞선 공수여단의 진*압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상당수가 다치고 여론이 나빠지니까 그들을 대전인가로 빼고 우리를 대신 투입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 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ㅍ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ㄷ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ㅇ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ㄱ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ㅈ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저녁 늦은 시간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군인들은 자제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있을 뿐 무*력 해산을 시키지 않았는데, 거리에는 시*위대뿐 아니라 시민들의 숫자 또한 엄청나게 늘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을 포위한 군인들을 보며 당신들 대한민국 군인들 맞느냐, 혹시 공*산군 아니냐고 묻기까지 하였다. 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이런 사태 앞에서 부대 지휘관들은 어떻게 할 바를 결정하지 못하고 열심히 상급 지휘관에게 무전으로 연락을 하며 작전 지시를 받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부대의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그대로 두고 조선대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군인들을 환송하는 일도 있었고, 시*위대는 퇴각하는 군인들을 뒤따르며 군가를 불러 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적ㄷ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순순히 퇴각하는 공수 요원들을 보고 군인 대열에 뛰어들어 군인들에게 악수를 신청하고 안아 주기도 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은 참으로 묘한 느낌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태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군인들은 작전상 철수를 하는 것인데, 마치 군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좋아하다가 결국은 더 크게 멍든 게 아닌가하여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때 그토록 좋아하던 순진한 그 젊은이는 과연 살아남아 있을까? 우리가 퇴각하던 그날 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대 앞에서는 무*서운 충*돌이 일어났다. 아마 9시쯤이었을 것이다. 뒤따르는 시*위대를 막기 위하여 군인들은 최루*탄을 계속 터뜨리며 퇴각하였는데,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중 일부가 소방차를 탈*취하여 군인들의 저지선을 뚫고 지나가는 위*험한 일이 발생하였다. 또 밤하늘에 화광(火光)이 솟았는데 후에 듣기로는 세무서인가가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둡고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장갑차를 앞에 놓고 공*포 사*격으로 시*위대를 막던 대대장은 무전으로 급히 실탄 사*격을 요청하는 것 같았는데, 허락되지 않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만 조르는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시*위대가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온 것은 조선대 내에 잡혀 있는 시민들을 풀어 달라는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과*격한 일부 학생들이 소방차로 저지선을 뚫기도 하고 돌을 던지며 기*습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어두운 밤에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은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하였고, 장갑차를 앞세워 추격하며 잡히는 학생들을 무ㅈ자비하게 죽ㄱ이기도 하였는데, 아마 이 날 밤이 광주사*태에서 본격적인 살ㄹ륙육이 시작된 날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고삐 풀린 상황 앞에서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들은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은 대학 앞 주택가였을 것이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ㅅ성과 최루탄 연기에 주택가의 불은 다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절*규와 고*함들과 비ㅁ명들로 범벅된 아비ㄱ규환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거리에서 군인들에 의해 맞ㅇ아 거의 초죽ㅇ음이 된 한 시민을 발견하였고, 순간적으로 부대를 이탈하여 그를 업고 어느 민간인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하나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한 골목을 들어서니 자그만 교회가 보이고 그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급히 문을 두드리니 한 노인네가 나오는데 키가 크고 인자한 기품이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더니 이내 자신의 서재로 나와 함께 부상당한 사람을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였다. 이미 거기에는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숨어 들어온 몇 명의 대학생들이 있었다. 공수부대원 하나가 군화도 벗지 않은 채 소*총을 들고 들어갔으니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불빛에 사람을 내려놓고 보니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었는데 이건 말이 아니었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의 노동자 같았는데, 머리는 진*압봉에 맞아 15센티 이상 벌어지고, 한쪽 팔도 맞ㅈ아 부러졌는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업고 들어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 살았는지 죽ㅇ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 그 교회는 학일동에 있는 ‘광주 새교회’이고, 그 목사님의 성함이 정인보였다는 것, 그리고 당시 백발이 성성하셨던 그 목사님은 지금쯤 이미 고인이 되셨을 것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내가 부대에 복귀한 21일은 광주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날일 것이다. 나의 부대 복귀가 무전으로 지휘관에게 알려지고, 나는 우리 부대가 쉬고 있던 상무대로 트럭을 타고 가게 되었는데, 군복에 피ㅍ가 범벅되어 돌아온 나의 모습을 보고 직속 상관은 대ㄴ노하면서 나를 심히 다루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나는 그가 내게 한 말이 가슴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밤새 나 때문에 애태운 것을 생각하면 화도 날 만하겠지만, 그는 내가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이고 평소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이 아닌지라 극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그의 말인즉 비상 계*엄하에서 부대 이탈이란 즉결 처*형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밤새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다 아는데, 여기는 전ㅈ쟁터이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바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말하며 나의 부대 이탈에 대해 얼마간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은 그 중대장과 다른 지휘관들의 처리에 일말의 고마움을 느낀다. 이 날 21일 오전, 우리는 걸어서 광주도청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의 모든 병력이 집결해 있었는데, 밤새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시*위대들이 격ㄴ노하여 차량으로 무*장하고 군인들과 무력으로 대치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군수 공장에서 탈ㅊ취한 도시형 장갑차를 몰고 돌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광주 청문회 당시 부대를 지휘한 자가 이 부분을 거론하며 시*위대의 장갑차에 의해 군인들이 희*생당하면서 발*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법원의 최종적인 기록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 앞에 나타날 때에는 거리에 군인들이 서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도청 앞에서 우회전하여 빠져나가고 말았다. 장갑차에 의해 공수부대원이 치어 죽ㅇ은 것은 당시 우리 여단에서 몰고 다니며 사ㄱ격을 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서이다. 나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하였는데,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 시*위를 보장받으려던 사람들이 협상이 안 되니까 급기야는 차량을 몰고 돌진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군부대의 장갑차가 급히 퇴각을 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치게 되고, 그가 현장에서 즉ㅅ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장갑차의 무한궤도 밑에 하반신이 깔린 그 병사의 상체가 위로 들려지며 입에서 붉은 피를 쏟아내던 처ㅊ참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특전사에 배속된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 병사였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전 비교적 아침 이른 시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이 난다. 도청 분수대 앞에서 시*위대와 군인들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시내버스를 탄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시*위대를 뚫고 나가 군인들에게 위ㅎ협적으로 돌진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놀란 군인들이 흩어지고 그 차량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게 되었는데, 이에 화가 치민 군인들은 분풀이라도 하듯 갑자기 길가로 뛰어들어 지나가는 시민들을 두*들겨 패ㅍ기 시작하였다. 마침 고무신을 신고 잠바차림으로 길을 지나던 40, 50대의 남자가 군인들에게 걸려들었고, 그는 금새 진*압봉에 맞ㅈ아 기*절하였다. 주변의 사태는 점차 술렁이며 다급해져 갔다. 나는 아무래도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 사람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아서 급히 뛰어들어 그를 안고 피신시키려 했다. 덩치가 큰 사람이었고 내 힘만으로는 부쳐 쩔쩔매고 있는데, 다른 대대의 중사 한 사람이 뛰어들어 도와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수백 명의 공수 요원들이 이를 보았고, 우리는 그를 끌고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후 시민들에게 이 사람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그때 같은 중대의 상급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내게 대*검을 들이밀면서 너 죽*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그때 그 질문은 내게 부질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런 내게 그는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너부터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우리가 부상당한 사람을 질질 끌어 그늘지고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 후 멀리 서 있던 시민들을 향해 보살펴 달라는 손짓을 하고 돌아올 때, 차마 군인들이 두려워 가까이 오지는 못하지만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던 사람들도 있지 않았던가. 전일빌딩으로 기억되는데, 그 앞에서 대치할 때에 청년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군인들에게 욕ㅈ지거리를 퍼붓는 일도 있었다. 화가 난 군인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에 그는 피가 낭자한 채 끌려오게 되었는데, 대*검을 목에 대고 죽*이겠다고 위ㅎ협하는 군인들에게 창백하게 질려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그의 공ㅍ포에 질린 눈과 모습 또한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때의 나는 일병 계급의 신분으로 격*노한 상급자들의 살*해 의지를 느끼면서 감히 말리지 못하였다. 끌려간 그 사람은 그때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21일의 도청 앞 발*포사건은 돌진하던 시*위대 차량들로 인해 퇴각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 우리 대대에 속한 병사가 깔려 주죽ㄴ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어났다. 장갑차가 밀려나면서 공수요원들의 저지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도청 앞 광장은 돌진하는 시*위대와 그들의 차량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다급해진 군인들은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나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발포와 함께 시*위대는 흩어졌고, 우리는 도로에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했다. 내 기억에는 그때 장갑차가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캘리버 50 기관총으로 무수하게 사ㄱ격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위ㅎ협 사격이 아니고 분명 실제 조준 사*격이었다. 어떤 자는 도청 앞에서 시*위대에 의해 발포가 시작되어 대응사*격을 하였노라고 말하기도 한 모양이나, 내가 알기로는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민들이 무*기를 탈ㅊ취하고 무*력으로 대응한 것은 이런 일들에 의해 군인의 사*격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지, 먼저 하였거나 함께 사*격으로 맞대응한 것이 아니다. 그때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도청 앞 도로에서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입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노출된 우리 중에 하다 못해 다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오후 4시쯤 도청에 있던 우리 여단의 병사들이 조선대로 퇴각할 때 도로를 걸어서 퇴각하였는데, 만약 이때에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사*격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도청에서 조선대로 퇴각한 후 우리는 곧바로 긴급한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 때에 조선대 광장에서 장갑차가 학교 주변의 주민들과 아이들, 그리고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을 향해 계속해서 사ㄱ격을 해댄 것도 기억이 난다. 철수하는 군인들을 보호하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은데, 여기서 실제로 조준사*격을 하였는지 아니면 위*협 사*격으로 사람들을 흩뜨리기만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급히 짐을 챙겼고, 저녁 7시 경 어두울 즈음 급히 조선대를 떠났는데, 주요한 문서나 장비들을 트럭에 싣고 떠나야 했던 본부대 병력이 시내를 빠져 나오다가 시*위대의 총ㄱ격을 받고 몇 사람이 죽*는 최초의 군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조건 앞사람만 따라 밤새 걸었고, 그 다음날인 22일 오전 11시쯤 되어서야 도착한 곳이 무등산 깊은 골짜기임을 알았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 전 병력뿐 아니라 확실치는 않으나 다른 여단의 병사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거기서 수송기를 통해 보급된 식량 및 일인당 580발의 실탄 그리고 수류*탄이나 가스*탄 등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 모두는 지친 몸을 쉬며 작전 명령을 기다렸다. 우리는 야만의 숲에 갇힌 맹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산중에서는 아마 포로로 잡아 왔던 대학생을 총*살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 일을 나는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목격한 다른 대대의 병사 하나가 내가 아는 후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왜 이런 부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더란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당시 그 일은 부대 내에서 소문으로 돌기도 하였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후 공수부대가 머물렀던 그곳에서 총*상을 입은 유골이 발견되어 그것의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다른 대대의 한 중대가 국도변에서 매복을 하다가 시*위대 차량을 발견하고 집중 사*격을 하여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사*살한 일도 발생하였는데, 당시 그 버스에 탔다가 유일하게 생존하여 후에 그 일을 증언한 한 여학생은 군인들이 피ㅌ투성이가 된 학생들을 하나하나 확인 사*살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무등산 골짜기에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을 머물렀고, 그 후 도청이나 광주 주요 시설들에 대한 탈환 작전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사이 이상하게도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가는 취소된 적도 있었다. 아마 많은 희생자를 내야 하는 최종 진*압 작전에 대해 한미 군부 내에서 이견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는데, 나는 아주 오랜 후에야 전*쟁에 대비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데프콘Ⅲ의 상황에서는 군 작전지휘권이 한미연합사로 넘어가고 미군측의 허락과 동의 없이는 어떤 군사적 행위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아무래도 임박한 시내 진입과 주요 시설 탈*환을 위한 작전에서 큰 희*생자가 나고 또 내 생명도 위*태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고, 텐트에서 나와 좀 떨어진 한적한 바위 밑에서 기도를 하였다. 너무 피로했고 또 단조로운 군생활에 아둔해져서인지 또렷한 의식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하나님, 제가 그래도 목사가 되겠노라고 신학대학을 다니던 사람인데, 이제는 무죄한 사람을 죽ㅇ이여야만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제가 언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죽ㅇ이을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으니 나로 이 궁지를 벗어나 죽*이지도 말고 죽*지도 말게 도와주십시오” 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당시 계절은 신록의 봄으로 산하는 한없이 푸르렀고 생명감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4일, 이 날은 나뿐 아니라 많은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요 처*참한 비*극의 날이 된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갑자기 철수 명령이 떨어졌는데, 산 속에 비트를 파고 숨겨 논 배낭과 장비들까지 다 가지고 간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투나 작전을 하기 위한 출동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철수하는 것임을 뜻하였다. 광주 외곽에 있는 송정리 비행장으로 새 거처를 잡고 아마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시내 탈*환을 위한 작전을 시행하려고 한 모양인데, 천여명의 병사들이 수십 대의 군용 차량에 탑승하여 장갑차를 앞세우고 비행장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우리들은 개인당 580발의 실*탄과 수류*탄이나 가스*탄등의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시*위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실*탄을 장전하고 경계하며 차량 이동을 하게 되었다. 국도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던 중 간간이 민간 마을을 향해 사*격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은 광주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고 마을의 주민들이나 아이들도 시내의 소요와는 무관하게 평소처럼 모내기를 하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그런 곳이었는데, 지금도 나는 왜 군인들이 그런 마을을 지나며 사ㄱ격을 해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두발씩 들리던 총ㅅ성은 이내 콩볶는 듯 하는 요란한 소음으로 바뀌었고, 논에서 모내기를 하던 농부들이나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어린이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이 총ㅅ소리에 놀라 혼비백산 흩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군인들의 말로는 시*위대가 나타나 그랬다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당시 사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실*탄 장전이 된 소*총을 가진 군인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본능적으로 사*격을 해댄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후에 알고 보니 이런 와중에 애꿎게 총에 맞*아죽*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여럿이었다. 잠시 후 송암동이라는 곳에서는 그러한 것보다 더 끔찍하고 내가 경험한 광주사태 중 가장 처*참한 일이 벌어진다. 광주 보병학교 일개 중대가 무반동포로 무*장하고 매복하다가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차량이 나타나자 이를 시*위대 차량으로 오해하여 사*격을 해대는 일이 발생한 것이 그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었고 5분 내외의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군인들이 평온한 주택가를 향해 사격을 해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몸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다가 머리 부분에 총ㅅ상상을 입는 일을 당했다 보병학교 병사들은 무반동포로 앞서 가던 장갑차를 명중시켜 깨어 버렸고, 뒤따르던 차량들을 향해서도 계속 공*격했다. 갑자기 폭*발음들이 사방에서 나며 총*격이 가해 오자 당황한 우리 쪽 군인들은 사*격으로 대응하거나 차량에서 뛰어내려 급히 길 옆 도랑으로 피신했다. 내가 처음 무언가 내 신체에 총*격이 가해진 것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나 자신의 실상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희미하나마 의식이 있었고, 만약 죽*더라도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내가 어디에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었고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나를 확인했다. 머리 뒤를 만졌는데 피가 낭자했다. 그리고 그 다음 얼굴을 더듬었는데, 이는 만약총*알이 머리 뒷부분을 때리고 관ㅌ통했다면 앞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굴을 더듬어 보았으나 구멍은 없었고 뒷머리 부분의 상처도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멀리서 손짓하는 불빛처럼 깜박였다. 차 안에는 나 홀로 누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차에서 뛰어내려 도피하는 동료들이 보였고, 사방에서 들려 오는 폭*발음과 총*격 소리, 무엇보다 살아나려면 빨리 차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몸을 일으켜 차량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거대한 폭*발발음파 함께 내 몸이 천만 갈래로 찢ㅇ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나뒹굴게 되는 두 번째의 변을 당했다. 아마 무반동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내 주변에 터진 것이었다. 폭*발에 휩싸이는 순간 나는 온몸이 큰 방망이로 맞고 찢*기는 듯한 큰 고통을 느꼈고. 다가온 주금 앞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 치며 울부짖어야만 하였다.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온몸이 파편에 뚫리고 찢*겨 피*투성이가 되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나는 땅에 엎어져 한없이 “아! 하나님, 아! 하나님” 하고 절망 가운데 부8짖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의 내력도, 신학생이라는 나의 신분도 한 순간 다가온 죽ㅇ음의 공*포보다 더 절실히 하나님을 찾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이 조금 지난 후 차츰 의식이 돌아왔는데, 주변에서는 여전히 포*탄이 터지고 요란한 총*격이 오가고 실*탄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고 있다가 내가 벌집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상호 오인으로 인한 교전은 잠시 후 멈추게 되었고, 평정을 찾은 후 사태 수급이 시작되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동료들의 시*신이 즐비하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뼈가 허옇게 드러난 것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난21일 아침 내 앞에서 어젯밤 스무 명을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옆 중대의 하사관도 있었다. 나는 그저 땅에 엎어진 채 가쁘게 숨을 몰아 쉬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호흡에 이상이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고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입만 하늘을 향해 벌어지는데 이제 영락없이 죽*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재차 엄습하였다. 나는 계속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 때문이었을까? 잠시 후 호흡이 다시 돌아오고 비로소 나는 내게 벌어진 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를 돌려 몸을 살펴보니 오른쪽 팔꿈치는 피가 흐르고 파*편이 박
05/05/18 13:45
대한민국은 전진해야 합니다.그런데...요새 정치권에서도 그렇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동력이 다소 약해지고 있는것같아 안타깝습니다.
05/05/18 14:31
전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으로, 얼마전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기지 건설 반대 집회에서 전경들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죠. 부대의 철조망을 내려앉히고 부대내로 진입하려는 과정에서, 전경들이 길을 막아섰고, 우리는 그들에게 돌과 각종 오물을 던지고, 길을 막고 있는 전경 버스의 창을 깼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물 대포를 날렸고, 쉴 새 없이 사이렌을 울려댔죠. 날씨는 덥고 전경들은 우리보다 세네배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죠. 얇은 옷을 걸치고 있는 저도 물대포를 맞아 몸이 습해지니 땀이 비오듯 흘렀습니다. 오물이 온 몸에 묻은 그들은 오죽했을까요. 누구에게도 즐거운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저기 멀리 무표정한 전경들 사이에서, 반미 민중 가요를 같이 따라 부르는 두 전경이 보였습니다. 시위대가 해체하면서,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서있는 전경들 앞에서, 짖궂은 친구 녀석이 갑자기 올라가 만사마 흉내를 냅니다. 전경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피식 미소짓지만, 이내 상관이 핀잔을 줍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휴게소에서는 전경들이 타고 있는 버스 수십여대와, 학생들이 타고 있는 버스 수십대가 동시에 주차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전경들은 휴게소 여기저기 모여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우리도 그 사이사이에 끼어 도시락을 먹었죠. 참, 이상한 상황이죠. 그들이 무슨 죄가 있는 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왜 우리와 싸워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권력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신분입니다. 518을 유혈 진압했던 계엄군이나, 시민군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부당한 권력의 희생자들이죠. 한마디로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는, 비극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05/05/18 14:56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다시는 이땅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경상도랑 전라도도 민주화 운동의 명맥을 이어, 더이상 싸우지 말고 화합했으면 좋겠습니다. ^^
05/05/18 16:37
어느덧 이십여년이 흘렀습니다.
광주사태에서 민주항쟁으로 바뀐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 당시의 주역들이 생존하며 어떤이는 엄청난 기득권을 누리며, 어떤이는 상처를 감싸안고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대로 일단락되어 넘어가 역사의 판단에 맡기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그들의 훈장은 아직도 빛나고 있나고 있고 그들의 권력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05/05/18 17:14
역사는 순환된다고 다들 말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쉽게 순환되지는 않습니다... 역사는 그 역사를 잊은 사람들에게만 순환되는 거죠... 잊으면 이런 역사는 언제라도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겁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거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_ _)
05/05/18 18:53
무고히 죽어간 시민들과 그가족들,현장에 투입됬던 군인들 다 씻을수 없는 상처를 가졌고 그들 모두는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가해자라고 할수있는 그당시 꼭대기에 있던 놈들은 반성은 커녕 아주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지요 정말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밉니다. 강풀씨의 만화에도 언급됬듯이 단죄를 내려야 합니다.
05/05/18 19:00
광주와 전혀 관계 없는 사람으로서 질문 하나 드립니다..
제가 여러 매체를 통해 들은 바로는.. 데모 진압이 과격해지자 일부 광주시민들이 경찰무기고를 탈환하여 경찰서등을 습격.. 군인들의 투항 경고에 반응이 없자 장갑차와 무기로 과격진압.. 제가 알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당시 정권이라든지 군인 이외에.. 무기고를 탈환한 일부 시민들도 같이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군인들 사상자도 있으니 말입니다..
05/05/18 20:01
시민들과 학생들은 그저 모여서 외치기만 했습니다...근데 그때
군인들의 첫 발포 이후 수십명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죽어나간후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무기등을 탈환하여 시민군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군인들과 싸워왔습니다..그리고..저수지에서 수영하면서 놀고 있던 소년들은 총으로 쏴서 죽이고..광주와 상관없는 주변마을의 지나가던 버스를 향해 총으로 쏴서 수십명이 죽고...말이나 됩니까..
05/05/18 21:00
카이사르님/ 전 훈박사님과는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만.. 선례를 보였어야 한다니요? 민간인 사살이라는게 그리도 쉬운건가요? 감히 군부대를 뭘로 보다뇨?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행동이 약간 과격하다 해서 너무 쉽게 이야기하시는 듯 합니다만.. 군대는 절대적 선도 아니고 단지 필요악일뿐입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시민을 지키기위한 한도 내에서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05/05/18 21:21
복숭아님 / 군대가 필요악이라면 국가는 그보다 더한 필요악일 뿐입니다.
청보랏빛 영혼님 / 정말 그 당시 광주에서는 경찰 무기고 탈환 같은 일이 없었습니까? 제가 본 책들에는 경찰 무기고를 탈환해서 시민군이 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요. 제가 읽은 모든 책들이 거짓을 기록한 건가요? 나름대로 현대사에 대해선 양 측 입장에서 이런저런 책을 폭넓게 읽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당황스러워서 그렇습니다.
05/05/18 22:11
군부대 진입 시위와 관련한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글을 다시 남깁니다. 시위대가 군부대를 진입하려했다는 것은 명분이었습니다. 즉, 전경들이 부대를 감싸고 있을 것을 알고, 군부대 안으로 진입하려는 모션을 취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죠. 때문에 저는 진짜 전경들에게 감정섞인 몽둥이 질을 하는 일부 시위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며, 안타까운 마음에 전경들도 우리와 같은 그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뜻을 모아 함께하는 그런 '퍼포먼스'가 뜻이 있었다는 것이지, 실제로 군부대에 진입하려는 행동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하려고 한 적도 없으며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전경들이 지키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방해안했다면 들어가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518 당시처럼 아무 이유없이 권력의 노예가 되어 무고한 사람에게 총을 겨눈 계엄군들도 실제는 피해자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군부대는 중요 국가 시설이며 무단 침입에는 처벌이 따른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단한 군부대 지키려고 서로 쇠파이프질하고, 총을 겨누고, 카이사르님 말씀대로 정말 본때를 보여줬다면... 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보여주려 했다면, 그건 시위대의 행동보다 얼마나 도덕적인 것인가요?
05/05/18 22:12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숭고한 목적이나 위대한 이상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그것이 수단을 정당화 하지는 않습니다. 시민군이 무장한 것은 사실이고, 군경과 전투를 벌인 것도 사실이며, 당시에 참가했던 여러 공수부대원들의 증언이나, 부검기록 등의 관련자료들을 종합해보면, 계엄군이 사용한 M-16소총보다 오히려 시민군에 의한 카빈소총에 의한 희생자가 더 많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지구상 그 어느 나라도 총기로 무장한 사람들을 민간인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그 목적은 위대한 민주화였다 할지라도, 과정에 있어서 경찰 무기고를 탈환하여 국군을 향해 발포한 사실은, 분명히 끝까지 파헤쳐서 진실을 밝혀내야할 사안입니다. 이건 절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염병은 대인용 무기가 아닙니다. 화염병은 원래 대전차용 무기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시위대를 방패와 봉만으로 진압하는 국가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외국의 세계화반대 시위등을 자세히 보시면 알겠지만, 분명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하여, 훨씬 강도가 약함에도 경찰이 고무총을 직격으로 쏴서 시위대를 사망시키는 경우가 엄청 많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시위대들이 미국에서 그런 방식으로 시위를 했다가는 당장 발포를 할 겁니다. 좋습니다. 쇠파이프와 화염병. 분명 용납할 수 없지만 용납한다고 칩시다. 그래도 총기류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에 그토록 많은 시위나 소요사태 등이 있었어도, 단 한번도 국군을 향해 발포하고 자신들을 시민군이라 칭하며 전투에 돌입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분명히 시민군은 경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했고, 국가의 공기관을 장악하였으며, 군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건 누가 뭐래도 사실입니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알지만, 이 정도면 방법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할 법도 합니다. 계엄군이 옳다는 게 아닙니다. 전두환 정권에 정통성이 없는 건 누구나 다 압니다. 이길 수도 없는 싸움에 광주 시민들을 선동하여 손에 무기를 쥐어준 자들은 반드시, 국군에서 발포명령을 내린 책임자들과 함께 처벌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군 희생자 23명. 서로 총질하다가 죽은 것 아닙니다. 민간인 희생자들 중 상당수가 카빈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광주사태는 결코 4.19나 부마사태처럼, 비폭력운동에 의한 민주화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05/05/18 22:18
제가 토론장에 올린 글이 [정치적 어쩌구]이유로 통보 없이 삭제되었군요. 그것에 대한 불만을 15줄 이상 표현하기는 힘들어서 여기다 적습니다. 이번에는 현 정권, 다음 대선에 대한 표현은 제외하고 올립니다.
1980년 518의 광주에서 있었던 일은 다음 중에서 무엇일까요? 반란. 사태. 항쟁. 먼저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현 시대에서 인정하는 사실 확인부터.... (1) 난.반란. 폭동 [暴動, riot]이란 무엇인가? 정의 : 조직되지 않은 인간집단(폭도)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력에 의해 소동을 일으키는 일. 반란 ·봉기 ·소요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폭동, 미국혁명과 러시아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폭동, 고대의 노예반란이나 중세농민들의 반란, 영국의 러다이트 기계파괴폭동(1811) 등이 유명하다. 오랫동안 경제적 ·신분적 ·계급적으로 억압당해 오면서 쌓였던 불만이 한계에 도달하여, 누군가가 일을 저지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집단으로 파급되어, 단순한 슬로건과 구호에도 민중은 흥분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나 폭도화된다.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폭발이므로 거대한 파괴력을 발휘하며, 종종 이러한 폭동이 기성체제에 주는 타격은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폭도가 지도자를 내세워 정치목적을 명확히 하고 조직을 갖추게 되면, 혁명 ·내란 ·해방전 ·군사행동 등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럴 경우 폭도는 군대가 되고 폭동은 국내전쟁이 된다. 물론 이러한 전화(轉化) 과정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폭동은 자연발생적인 경우가 많지만, 민중의 불만이 한계점에 이르는 시기를 노려 국내의 극우 ·극좌 세력 또는 외국의 스파이가 폭동공작을 획책, 기성체제에 타격을 가하여 혁명 또는 반(反)혁명에의 돌파구를 만드는 수도 있다. 이것이 교묘하게 행해지는 경우 자연발생적인 것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 광주의 시민들은 무기를 들긴 들었으되 진압되고 실패하였다.
05/05/18 22:19
다음은 여러가지 난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제목만 나열.
1. 지배층끼리의 반목-갈등으로 인한 폭력사태 대공의 난(大恭). 김지정의 난. 왕규의 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이괄의 난 2. 지배층 - 피지배층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사태 ==> 민란 (1)명학소의난 망이(亡伊) 또는 망소이의 난(亡所伊亂)이라고도 한다. 1176년 고려 명종 때 충청 남도 공주의 명학소에서 일어난 천민의 난. 천민 수공업자의 집단 거주 지역인 명학소에 살던 천민들이 망이, 망소이의 주도 아래 일으킨 신분 해방 운동이다. 고려 무신 정권하에서 일어난 천민의 저항 운동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은 공주를 점령한 후 북진하여 1년 반 동안 청주와 아산 등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남부까지 휩쓸었다. 정세유가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난을 계기로 정부는 향, 소, 부곡 등 천민 거주 지역을 군현으로 승2격시키는 등 천민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게 되었다. (2)만적의 난 고려 신종 1년(1198년)에 만적( 萬積)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 운동. 만적은 개성의 북산에 공사 노비가 모인 자리에서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우리네도 상전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면서 난을 일으킬 것을 의논했다. 이에 여러 노비가 찬동하여 관노는 관청에서, 사노는 성내에서 들고일어나 권신과 상전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살라 버린 뒤에 정권을 잡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한 사노의 밀고로 계획이 사전에 드러나, 노비 해방을 위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3)진주민란(晋州民亂) 1862년(철종 13년)에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을 겪던 농민들은 새로 부임한 진주 병사(兵使) 백낙신이 가혹한 탄압과 착취를 일삼자, 양반 출신의 농민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관아를 습격하고 환곡을 불태우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보내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난을 계기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3. 외세와 조정에 대항하는 반란 삼별초의 난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三別抄)가 몽고의 세력에 저항하여 일으킨 반란. 몽고의 침략 아래서의 조정에 대한 반란이자 항몽의 싸움이었다. 최씨의 무인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도에 피란해 있던 조정은 환도 문제로 논란이 심했다. 개경 환도(開京還都)는 몽고에 굴복하는 일이라 하여 삼별초에 속하는 무신들은 환도를 주장하는 문신들과 맞서게 되었다. 몽고에서 굴욕적인 약속을 하고 돌아온 왕이 삼별초를 설득하였으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환도가 결정되고 삼별초를 해체시키자는 조정의 결의가 있었다. 이에 삼별초는 몽고의 공격을 예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1,000여 척의 배로 강화에 있는 가족들과 재물을 싣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군은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잡았으나, 관군과 몽고군에 밀려 일부는 달아나고 일부는 탐라(제주도)로 들어가 저항하였다. 조정에서 회유책을 써 보았지만 그들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군의 탐라 공격으로 결국 삼별초는 항몽 정신만 남긴 채 저항하다가 진압되고 말았다. 4. 실패한 지식인이 노동자. 농민을 선동한 난 홍경래의 난 조선 순조 11년(1811년)에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洪景來. 1780∼1812)가 일으킨 반란. 홍경래는 지혜가 있고 문재에 뛰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지방 차별의 폐습으로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자 부패한 국정에 불만을 품고, 순조 11년(1811년)에 평안북도 가산의 우군칙 등과 더불어 서북 지방에 대한 정부의 차별을 구실로 난을 일으켜 스스로 평서 대원수라 일컬었다. 4개월 동안 계속된 홍경래의 난으로 한때 청천강 이북의 땅이 그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그 이듬해 4월 정주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죽었다. 이 난은 하층 양반과 중소 상인 및 유랑 농민이 합세하여 부패한 조정에 항거한 사건으로, 그 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민란에 영향을 끼쳤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19세기 초에 우리 나라 서북 지방을 뒤흔들어 놓은 대규모의 농민 항거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5. 쿠테타 (1)임오군란(壬午軍亂) ==> 실패한 쿠테타 ==> 외세의 개입을 초래했음 1882년(조선 고종 19년) 6월에 일본식 군제(軍制)와 민씨 정권에 반항하여 일어난 우리 구식 군대의 병란.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와서 난을 간섭하게 되고, 일본과 강제로 제물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2)무신의 난 고려 때 무신들이 일으킨 변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와 무신에 대한 여러 가지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났다. 좁은 뜻으로는 정중부의 난(1170년)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무신의 난 모두를 가리킨다. 무신의 난이 처음 일어난 것은 현종 때의 김훈의 난, 최질의 난이며, 그 뒤 정중부의 난으로 본격화하여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등이 잇달아 집권자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여 무신 정권 시대를 이루었다.
05/05/18 22:20
(3)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소장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6 ·25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다.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하였다. 반공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정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 ·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4) 1212 하나회 하극상. 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하여 사후승인을 받음.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된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2·12사태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 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05/05/18 22:20
현대사의 여러 민란들
(1) 제주의 역사 4.3항쟁 8 ·15광복 직후의 혼란기를 틈타 남조선노동당은 제주에 지하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제주인민해방군은 일본군이 숨겨놓은 무기와 화약을 찾아내어 무장을 하고 유격전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투쟁을 벌이던 제주도민에 대한 경찰 및 우익단체의 무차별한 테러가 극심하여 도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북 출신의 경찰관들이 제주에 파견되자 이를 계기로 좌익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반미 ·반경찰 ·반서북청년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중봉기를 주도하며,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군정청은 경찰병력을 제주에 투입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군을 투입하여 제주도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약 9만 명의 이재민과 엄청난 재산피해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주에서는 5 ·10선거를 치르지 못하였다. 비록 이 사건은 발발 1년 만인 1949년 5월 일단 종결되었으나, 봉기의 여파로 인한 완전진압은 6 ·25전쟁을 거쳐 1954년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2) 여수·순천사건 [麗水順天事件]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좌익계열 군인들이 일으킨 무장봉기반란. 목적은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려고 함. 여순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부른다. 제주4·3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고 하였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고 하여 1995년부터는 '여수·순천사건'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사용한다. (3) 부마민주항쟁 [釜馬民主抗爭] 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학생과 시민 중심의 박정희(朴正熙)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반정부시위사건.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金泳三)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은 여야격돌로 더욱 경색되었다.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비록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4) 5·18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하였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를 개최했다. 원인은 박정희(朴正熙)의 오랜 군사독재가 통치능력을 상실한 일련의 사태, 즉 1979년의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 제명파동, 같은 해 10월 16일의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10월 26일 김재규(金載圭)에 의한 대통령 박정희 시해사건(10·26사건) 등이 초래한 국가적 위기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고 군사독재의 연장을 통하여 해결하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신군부세력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시작하자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이에 반발하는 학생 ·시민 연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시민항쟁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공동체 구현 등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군을 투입한 무력진압에 정부공식 발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對美認識)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 ·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05/05/18 22:20
강풀 만화 되짚어보기..
땡전뉴스.. 수십명의 시체 사진과 수백명의 부상자 사진...한겨레 박재동 선생님 만화. 모래시계에서 나온 대사. 과거의 난과 광주사건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홍경래의 난이나 부마사건과 닮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지요? 양민/ 학살이란 말은 총기를 들지 않았을 때만 성립하는 말이다. 광주시민은 무기고를 탈취하고 무장봉기를 하였다. 서로가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선 사소한 오해로도 총구는 당겨진다. 전두환이 살아있고, 당시 피해자가 살아있기 때문에 결코 망각해선 안되지만...언제까지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그것도 전두환과 당시 당사자가 다 죽으면 잊혀질 일인 것을... 과거 역사에 한때 그런일이 있었다 정도인 것을...일본 제국주의나 박정희 군부독재 역시 마찬가지 [계엄]에서 총을 든다는 것은 죽여달라는 말이다. 국가공권력을 부정하는 행위. 그들은 과연 무슨 이유에서 죽어갔을까? 김대중 선생님의 석방? 전두환의 퇴진? 정말 나라를 생각해서? 국민 전체의 민주화(민중이 주인되는세상) 그런거? 그들은 정권을 잡고 싶었을까? 왜 총을 들었지? 간디 같은 비폭력주의는 안되나? 80년 5월의 광주는 무정부 상태였다. 시민자치상태 였다는데 유의할 것. 성공했다면 프랑스 혁명 같이 되었을지도 모를터...
05/05/18 22:21
항상 난이란 정치가 불안정하면 발생해왔다. 권력이 공백이 생기거나 약해지고 경제가 나빠질때 치안은 나빠지고 민중은 봉기한다.
516 군사정변과 1212 하극상은 여러가지 점에서 배경이 다른데, 516의 경우 기존 정치가 너무 썩어서 사회적 혼란이 크게 야기되었고 잘못하면 북괴에게 다시 점령당할지 모르는 국가위험사태. 516 때는 광주사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516은 [구국의 결단]이란 기치를 걸만했지만, 1212는 그렇지 않다. 둘다 똑같이 정권을 잡은 후에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이 있었다. 둘다 똑같이 결국은 미국이 인정해주었다. 둘다 똑같이 분단된 반공국가라는 상황을 내걸었다. 애당초 분단된 국가에서 어쩔 수 없는 반쪽짜리 이념 전쟁이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시민, 노동자, 농민 시위 평화로울 때는 좋으나 과격해지면 결국 진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완전한 통일된 독립국이 아니다. 518 광주사건과 516군사정변의 교차점에 김대중 대통령이 있으며, 부마사건과 광주사건의 공통점은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란 정치인의 옹립세력이 있었다는 점. 그 당시 역사의 당사자가 아닌 젊은 세대가 먼저 해야할 일은 사실의 확인이다. 죽은 사람은 불쌍하다란 감정적 논리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사람중에도 가짜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일제시대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진중에는 조작된 사진도 있음을 알고 있는가? 광주사건 역시 마찬가지,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으면 보상금 때문에 사기가 꼭 끼어든다.
05/05/18 22:21
광주인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계기를 이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광야에서]의 가사는 어떨까요?
광야에서 노래.안치환 작사작곡.문대현 찢기는 가슴안고 사라졌던 이땅에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팔에 솟아나는 하얀옷에 핏줄기 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 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 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삼남(특히 양남-전남 경남)은 정말 뜨거운 사람들인가봅니다. 현대사의 주된 사건들을 거의 다 일으켰으니까 말이죠. 실리에 밝은? 서울 사람(강원,충청 포함)이라면 광주인들 같이는 행동하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다음에도 저런 일이 있을 때 총들고 죽으러 가겠습니까? 아니면 죽창들고 낫들고?
05/05/18 22:43
광주반란 - 광주사태 - 광주항쟁. 용어는 변화해왔고 진실은 하나가 아니다. (저는 그냥 518광주사건으로 부릅니다.)
항상 역사는 민중의 봉기로 얻은 열매는 다른 정치인이 가져간다. 그렇게 한국 현대사는 흘러왔고 부마사건, 광주사건의 이익을 김영삼/김대중 씨가 얻고 갔으니 진정한 민주주의는 노무현 시대부터라고할 수 있을 것이다. 518 광주사건은 25년전의 현대의 비극이고, 그야말로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행진한 사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ps) 지금은 왜 김구 선생님을 암살한 안두희 같은 인물은 안나오는 것일까? 전국민을 상대로 평화의 댐 7000억 사기, 지금도 29만원 사기, 수천명의 인명을 죽인 장본인인데..그렇게 죽이고 싶다면 한 명쯤 의사가 나서도 될텐데 말이다. 다시 사실관계부터 확인하고 보면, 광주사건은 하나의 민란이다. 무장봉기 사건이며 저는 홍경래의 난이나 부마사건과 아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 약탈/방화 같은 일반 폭동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정치적 신념? 때문에 죽은 것이겠지요. 5.18일 전에 양 김씨가 시위를 자제해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시위는 격화되었고, 그리고 5.18일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서 유혈사태, 소문 들은 광주시민이 최대 30만명까지 모임. ==> 도청 장악, 무기고 탈취. 시민군 조직에 무정부 상태...그럼 여러분이 위정자라면 어떻게 행동해야겠습니까? 광주라는 하나의 도시였기에 망정이지... 비교해서 말하자면 315부정선거후 419 이후의 정치상황으로 온 나라가 엉망이었다면... 또 다른 516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설득이 안되면 결국 진압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전두환은 설득 시도도 안했지만요. 그럼 거기서 시민들이 이겼으면 바로 김대중 대통령을 옹립하시렵니까? 목적 못지 않게 수단도 합법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518의 역사적 의미도 설명하면서 시민사회에 보다 책임있는 참여를 부탁한 것이겠지요.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14&article_id=0000175341§ion_id=100&menu_id=100 1980년 5월 광주, 일부는 정치적 신념으로 죽었고, 일부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죽었습니다. 어쨋던 현 시대의 사람들은 역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5월의 광주사건으로 민주화가 앞당겨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마찬가지 논리로 박정희의 근대화로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05/05/18 22:49
위에 카이사르님 댓글은 토론게시판에서 옮겨온듯한데 위에 이경남목사의 글을 읽어보시고 떠들어도 떠드시기 바랍니다.(엄청난 분노를 느끼지만 참습니다) 518당시 군인 사상자 대부분은 오인사격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이경남 목사가 목격한 사실입니다(이분 당시 공수부대원이었습니다) 518당시의 사람들이나 지금의 광주사람들이 정말 끔찍하게도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전두환이지만 님처럼 제대로된 사실도 모르면서 목적이 수단을 운운하는 사람들도 정말 증오합니다. 막말로 님 집에 강도가 칼들고 와서 가족을 찔러도 님은 폭력은 무조건 안되기 때문에 말로 강도를 타이를 겁니까?
05/05/18 22:49
카이사르님/ 5.18민중항쟁을 '비폭력투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광주에서 자랐고, 한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알고 있는 내막으로는, '경찰서 무기고 약탈' 사건은 분명히 있었고 그로 인해 도청 시위대가 총기류로 무장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자, 그런데 폭력투쟁이었던 게 문제인가요? 어쨌건 폭력은 안 돼! 입니까? 형법에 '정당방위'라는 게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유없이 나를 죽이려고 하면, 그 방어행위를 함으로써 그 상대방을 죽이게 된다 할지라도 본인은 처벌받지 않게 되는 거죠. 국가권력, 군인의 총격에 의한 학살이 시작된 후에 비로소 진행된 '시민군'의 결집은 정당방위로 보아도 무방한 일입니다. 그조차도 무력한 것이, 헬기와 장갑차, 탱크가 시내를 활보하고 있는 상황에 카빈 소총 몇천자루가 상대가 되겠습니까? 화염병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위험한 무기라는 식으로 과장을 하셨던데, 말씀대로라면 화염병은 차라리 일반시위에서는 등장하지 말아야 할 물건입니다. 대전차무기라면서요? 시위진압을 위해 전차가 동원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별 효용없는 화염병도 나올 일이 없을 테니까요. 좀 웃기는 대목이었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카이사르님 분위기가 살짝 전경/의경 틱하시군요.
05/05/18 22:54
덧붙여 말씀드리지만,
우리 나라에 수많은 폭력시위/시민군의 역사가 있습니다. 동학군은 어디로 까잡수셨나요? 다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이랑만 싸웠다고 생각하시나보죠? 우금치에서 전멸당한 동학농민군은 우리 민중이었고, 일본군과 연합한 조선의 관군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05/05/18 22:58
광주시민군이 제대로된 전투를 한것도 아니고, 정말 살기위해서 개죽음당하지 않기위해서 싸웠는데 총들었으니까 잘못되었다는 논리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리고 "민간인 사상자 상당수가 카빈소총에 의해서 났다는말이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말에 책임 질수있는지 엄중하게 묻고싶습니다. 근거가 있다면 정확하게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05/05/18 23:06
근거 제시하세요. 사상자 상당수가 카빈소총에의해서 발생한 근거를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님말이 사실이면 518은 재평가받게 될겁니다. 시민군이 시민을 학살한 난동으로 말이죠.
05/05/18 23:09
저는 계엄군에 정통성이 있다고 한 적 없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까지 부르면서,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절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시위가 과격해지면 결국은 진압할 수 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총을 들고 무장한 시민군을 방치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광주에서 독립국이라도 하나 세우시려구요? 시민을 향해 발포했던 세력과, 국군을 향해 발포했던 자들 모두를 처벌하고, 모든 진실을 떳떳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지, 저는 결코 광주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계엄군이 잘했다고 하고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05/05/18 23:09
카이사르님/ 화염병의 역사는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재미는 있는데 별로 알고 싶은 부분은 아니고요. 대전차무기로 강력한 효능이 있다고 해서 대인무기로도 그만한 파괴력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죠. 수많은 시위를 겪어봤지만 화염병으로 누가 죽었다는 소리는 못들어봤네요. 최루탄에 죽어간 사람 얘긴 많이 들어봤어도.
'봉과 방패'만으로는 우리나라가 유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염병을 던지는 게 우리나라만은 아니구요. 68년 5월 혁명때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에서도 던졌거든요? 그때도 총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네요. 그때도 시민 상대로의 사격이 있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못 들어봤어요. '화염병 던지는데 미쳤다고 방패들고 진압합니까?" 네, 저도 '미쳤다고 진압합니까?'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냥, 안 하셨으면 좋았을 뻔 했네요. 8,90년대에 전/의경 복무한 것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닐텐데요. 더군다나 뺑뺑이가 아닌 지원에 의한 선택이었다면요.
05/05/18 23:09
울컥..하네요.. 카이사르님이 말씀하신것과 그떄의 광주가 비교대상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울기동대에서 힘들게 복무하셔서 그런건가요; 비교될 사항이 아닌데요..
05/05/18 23:11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라구요..윤봉길의사나 안중근의사도 그럼 "의사"자 빼야겠네요.. 앞뒤를 봐서 생각하시는게 .. 휴.. 한숨만 먼저 나오네요
05/05/18 23:18
카이사르님은 서울기동대에서 군복무를 했다면 잘알테지요 화염병안던진 학생들을 향해 발사되는 최루탄이 얼마만한 위력을 가졌는지 ..카이사르님은 그최루탄 목숨걸고 피해가며 도망친적은 있습니까? 반대로 날아오는 화염병에 목숨걸고 피한적은? 연세대 이한열군 그리고 그옛적 혁명의 도화선이된 이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어린중학생의 죽음, 공통적으로 그둘은 날아오는 최루탄에 맞아 그것도 정조준된 탄에 맞아 죽었지요 전 80년대 그 데모와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점철되던 시대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머리위를 스쳐가느 최루탄에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온게 몇번인지....카이사르님은 툭하면 불법불법하시는데 , 아쉽게도 세상은 그것도 한사회의 체계는 어린애 밥달라고 투정하듯 보챈다고 바껴지지가 않습니다. 카이사르님이 그불법폭력에 무법천지를 만든 자들이라고 사실상 질타하는 그분들이 없었다면 님은 지금도 전두환정권의 철권 죽으라면 죽어 하라면해 자유고 민주주의고 내말이 진리요 법이야 하는 그정권아래에서 지금도 그청춘을 그리고 군대를 갔다왔어야 할겁니다. 나는 다만 불법을 무법을 논하는것이라고 하지마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님과 같은 여러후손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안겨주기 위해 그지옥의 업보를 지고가신 분들이 너무도 처량하니까요
05/05/18 23:22
카이사르님 근거 밝히시라니까요. 카빈소총에 의해서 민간인사상자가 상당수 발생한 근거 제시하세요.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질줄은 알아야죠. 님이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그 근거를 대시기 바랍니다.
05/05/18 23:26
화염병과 전의경 이야기는 토론의 중심을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만큼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지금도 많은 전의경들이 쇠파이프 아래에 쓰러져 가고있고, 경찰병원은 언제나 다치고 부상당한 전의경들로 넘쳐납니다. 많은 전의경들 또한 시위대처럼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 하나 만큼은 깨달았습니다. 그 어떤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시키진 못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하는 소리 중에 틀린 소리 별로 없다는 것을. 민주화 당연히 해야 하고,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들 풀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단지 방법이 문제였을 뿐입니다.
05/05/18 23:32
카이사르님//
댓글에 상당히 논쟁거리가 될만한 민간인의 상당수가 시민군에 의해 살 해 되었다는 말과 시민군이 먼저 진압군에 발포했다는 식의 말씀들이 있는데 이건 분명히 해명해 주시고 가셔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팩트 에 의해 그런 말이 나왔고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전의경들의 이야기는 저도 공감합니다만 지금의 시위대 와 당시 시위대 간의 목적의 차이가 분명히 있고 시위 방법도 틀리다고 봅니다. 지금의 전의경의 상황과 당시 전의경 상황을 같이 놓고 보신다면 곤란할것으로 보입니다.
05/05/18 23:36
1. 시위로 인한 사상자보다 구타/자살 로 인한 사상자가 더 많은게 현실 아닌가요?
2.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키진 못한다. 이견이 있긴 하지만, 헌법 전문을 근거로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폭력이라는 수단을 용인한다는 거죠 3. 국가를 양아치 군인들이 강간하고 있는데, 절대 폭력은 행사 하지 말고 소리만 지르라는 겁니까? 아무리 개인주의가 판을 친다지만... 그 군인들의 총부리가 당신을 향한다면 분명 게시판에 5.18 을 폄하하는 글이 아니라 비명글이 남겨 졌겠군요.
05/05/18 23:46
그 자료가 정부에서 작성한 공식자료라면 믿고 자시고 할거없이 진실규명에 들어가야하는 사항이죠. 님은 지금 님이 말한 내용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인지 감이 잘 안오시나 본데요. 카이사르님은 지금 엄청난 발언을 하신겁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님말이 사실이면 518은 처음부터 다시 쓰여지게 될정도로 중요한 말이라는 겁니다.
05/05/18 23:46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키지 못한다는것은 악법도 법이다와 함께 가장 가식적인 격언이지요 거의 날조에 가까운(실재 악법도 법이다는 완전 날조이죠 대한민국에서만 존재하는게 아닐까하는) 그런 사탕발림같은 말은 필요 없어요 카이사르님은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때의 세대가 아닐거라는 확신이 드는것이 광주가 사실상 완전 고립되고 정부에서 퍼트리는 유언비어에 루머가 온 신문지상을 가득메웠을때도 시민군이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시민군이 민간인상점을 약탈방화했다는 조작성 루머는 만연했어도 그따위 말은 없었다는 겁니다. 시민군이 파출소를 습격해 카빈총을 획득한건 사실이지만 당시 시민군에게 넘어간 소총의 대수조차 극소량이고 무엇보다 실탄이 얼마안되 시민군의 무장상태는 정말 저열하기짝이 없었지만 어쨓든 그걸로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말은 광주시민들을 악의 화신으로 몰아가 온갖 죄란죄는 다 뒤집어 쉬우던 그정권에서도 만들어내지 못한 말인데 황당하군요
05/05/18 23:47
광주사태 정도되면 정당한 저항권의 행사이지요.
국가가 민주질서의 기본질서를 뒤흔드는 행동을 할 때는, 국민은 폭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저항권이 인정됩니다.
05/05/18 23:47
(공수부대 장교 출신 양효용님의 글)
참고로 저는 475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마사태 당시에는 부산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시위에 참여했으며, 그 후 대학교를 졸업을 하고 군에서는 공수부대를 지원해서 광주사태 당시 광주 진압부대였던 3공수특전단에서 장교로 팀장 근무를 했었지요. 물론 제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도 어느 기간, 어느 지역, 어떤 한정된 상황이나 사항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와 상황도 그 당시 그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여러사람이 객관적인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근무했던 공수부대 대대는 부마사태 당시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 주둔을 하며 계엄군 임무를 수행했더군요. 그러다보니 고참 중사와 상사들은 저희 대학의 매점 아가씨들과 이발소 아저씨 들도 잘 알고 있더군요. 학교앞의 책방 주인아저씨, 식당 아줌마들 까지도 모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고 어떻게 자신들과 지냈는지도 얘기를 했어요. 4년동안 그 학교를 다녔으니 금방 알 수가 있었죠. 그 중 한 하사관(중사)는 철수한 그때까지도 그아가씨와 가끔 편지를 주소 받는다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민간인과 친했었다는 얘기죠. 광주사태 당시 그들은 부산 마산 사태의 진압경험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 7공수와 11공수가 실패한 진압 임무를 넘겨받아 광주에서 전남 도청 등을 접수했었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전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 아래에서 일방적으로 전두환 정권에게 유리하게끔 보도되었던 행태를 지금의 언론에서 이제와서 또 다시 새로운 김대중 정권에 아부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어요. (글쎄요... 왜곡이란 표현이 지나치다면 한 쪽의 얘기만을 계속 보도하고 있다고 변경하죠!) 전두환 정권 당시 일방적으로 보도를 했던 것 처럼(그게 자의건 타의건 간에...)지금은 공수부대나 그 밖의 진압군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부치고 있어요! 당시 공수부대에 있으면서 모든 걸 보고 듣고 경험했다는 현직목사도 어느 한 면만 보고 듣고 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마치 계엄군, 진압군들의 전체 대표인양 방송매체에 나와서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5-17 전후해서 TV에상당히 많이 나오시더군요)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분은 상황별, 시간대별, 지역별로 발생했던 것을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쏟아놓을 만큼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고 또한 진실을 얘기할 용기가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좀 심하게 얘기하면 지금의 386 국회의원들과 기성 정치인들처럼 다음 번 국회의원 자리 공천을 노리는지도 모르죠! (이 얘기가 심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어제 오늘의 사건들을 보십시오.(517 NHK, 문 장관, 장원 대변인)어느 누구 믿을만한 지도자나 위정자들이 있는지... 그 당시 왜 공수부대원들이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쏠 수 밖에 없었는지?! 광주 시민들... 그들은 순수하게 시종일관 비폭력, 비무장 시위를 했었는지?! 당시의 공수부대의 군기는 어떠했는지?(지금이나 그때나 최강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공수부대가 일방적으로 광주시민들을 때리고 죽이고 해치우기 위해서 내려갔다면 왜 그렇게 훈련이 잘되고 잔인했다는 공수부대원들이 6-25 전쟁 당시의 겁많고 의심많은 미군들처럼 미소를 띠고 다리 밑으로 유인을 해서 한꺼번에 몰살을 하지 않았는지? 정말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의 대부분 남자들이 군대를 다녀왔는데 군대에서는 아무런 명령이나 기강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찌르고 죽이고 할 수가 있답니까? 그것도 전국 8도의 장정들이 다모여 있고 별자리부터 이등병까지 편제 되어 있는 군대조직에서 말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방송에서 많이 나오는 진압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한 것이 전부였지요. 그것도 진압 초기에는 횡대로 열중쉬어만 하고 있었던 것을 점차 시위가 난폭해지고 차량을 이용한 습격이나 돌진이 자주 발생하자 자위의 일환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공수부대원들을 대변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광주항쟁을 폄하하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어느 한 쪽만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짓거리를 다시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지금이라도 광주의 원혼을 달래려고 누군가를 죽이려면 용감하게 나서서 그 당시의 괴수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영 등등 하나회 골수들을 사형시켜야 하고 당시의 장관 주영복이를 비롯한 정부 관리들을 처형해야합니다. 그들을 다 풀어주고 사면시켜 놓고서는 이제와서 무슨 짓거리를 합니까? 그게 화해이고 용서입니까? 단지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는 것이지요.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고... 70 -80년대 우리나라의 시위에 참가해 본 사람들은 느낄 것입니다. 그건 장난이 아니라는 걸... 그 당시 광주의 그 살벌한 상황에서 그래도 공수부대원이니까 그 정도로 극도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견뎌내었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광주사태에 비하면 완전히 장난이었지요. 덩치 큰 레슬러와 중학생의 시합 정도였다고나 할가요? 군화발로 땅만 한 번 크게 굴러도 우르르 도망가던 그런 상황과 비교해서 광주는 그야말로 전쟁터였습니다. 바로 코앞에서 수십만의 군중이 무장을 하고 빌딩의 여기 저기에서 버스 뒤 트럭 뒤에서 총을 쏘고 돌을 던져대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기어코 죽이려고 덤벼드는 상황 속에서도 대응하지 못하고 총도 발사하지 못하고 상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급기야는 부상 당하고 구타 당하는 동료와 전우들을 보면서 울면서 팀장 대대장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모습, 그게 안되면 몽둥이라도 휘두를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하던 모습들이 선합니다. 벽돌과 각목으로 방향과 속도를 조정해서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버스와 트럭 앞에서도 마음 놓고 도망가지도 못하고 코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다가 피하기도 하고 다리가 절단되고 머리가 깨지기도 했던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진압봉 한번 꺼내들지 못했습니다. 시민을 자극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만 후퇴를 명령받고는 퇴로를 뚫기 위해 공중으로 공포를 쏘아 갈기기는 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경우는 분명히 있었죠. 그렇지만 많은 사람을 향해 더구나 무고한 학생과 부녀자들을 향해 쏘아 갈긴 것이 아니라 교도소를 사수할 때 교도소에 있는 정치범들을 탈출 시키기 위해 총을 쏘아 대며 게릴라 식으로 달려드는 불순분자(그땐 이렇게 표현했지만 지금도 크게 다른 표현 방법이 없네요)를 향해서 경고 방송을 하고 위협사격을 한 후 그래도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쏘았었지요. 야간에는 더 심했었지요. 공수부대원들은 교도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수를 한 것이지요. 가만이 몰래 숨어 있다가 죽인 것도 아니고 경고 방송과 위협사격을 먼저 한 다음에 말입니다. 그건 그래도 달려드는 그들이 대한민국 시민일라는 판단에서였죠. 만약 전쟁 중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제가 공수부대 있을 때 하사관들과 병들에게 가르친 과목 중에 모택동의 유격대활동을 포함한 국민당 군대와의 전쟁, 전투 등을 가르친 것이 있습니다. 민중과 게릴라는 물과 물고기와 같아서 민중이 없으면 게릴라도 생존할 수 없다는 그런 것 말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우리 부대원들이 임신한 여인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는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느 병사가 개인적으로 부대를 이탈해서 민가에 들어가 절도를 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지요. 그들도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거든요. 다만 얼룩무늬와 짙은 위장에 의해 표시가 잘 안났을 뿐이었지요. 그래서 혼자 아니면 몇몇이서 개별 행동을 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부산 마산에서는 말그대로 공수부대원들이 꽥소리 한 번 안지르고 단지 트럭을 타고 밤새 시위하고 위협방송한 것 만으로 시위대는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그야말로 경찰이 전혀 손을 쓰지 못했던 그런 상황이 거의 하루만에 진정이 되었던 것이죠. 대학생 시위대였던 우리들이 방송국, 신문사를 점거했지만 물론 기물의 파손이나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의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행동은 하지 않았었죠! 서로가 극도의 자제를 한 것이지요. 그러나 광주는 달랐습니다. 거기엔 분명 간첩들과 정치적 선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광주의 시위대도 공수부대를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부산 마산처럼 이내 진정이 되는가 했었죠! 하지만 그렇게 되자 거대한 시위, 소요를 원하는 자들이 당황하면서 불순분자들을 더 투입하고 그들을 선동하여(군복을 갈아 입혀서...) 민가에 침입을 하여 강간, 방화, 절도 등을 하고 같은 민간인들을 구타하여 마치 공수부대원들이 그렇게 한 것 처럼 처리를 한 것이죠. 분명 엄청난 유언비어들이 난무했습니다. 제가 공수부대의 한 팀을 지휘했던 사람으로서 민간인을 상대로 그렇게 할 수 가 없죠. 당시 공수부대의 도별 분포를 보면 인구분포상 경상도가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전라도 순이였어요. 경상남북도 인구가 제일 많으니 당연히 거기서 오는 청년들이 군대에 입대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전라도 병사만 빼고 경상도 인원만으로 그런 일을 저지르게 합니까? 그리고 장교들도 육사, 삼사, 갑종, 학군(ROTC) 등 분포가 다양한데... 직업군인이 대부분인 육사나 삼사만 있었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그래도 몇 % 있다고 하지만 ROTC장교들이 전체 초급장교의 80%인데 그럴 수가 없죠. 그랬다면 당시 진압군으로 참가를 했던 학군장교들이 지금껏 가만이 있었겠습니까? 당시 투입되었던 장교들 중에 ROTC는 16, 17, 18기 정도가 근무했을 기간이었지요. 아마 18기는 시기적으로 당시 광주 보병학교에서 OBC 훈련을 받고 있었을겁니다. 한가지 더... 지난 국회 광주 청문회에서 중앙일보 사이비 기자의 손에서 얻은 광주사태 당시의 사진이라면서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실었던 사진이 있었지요! 김대중 정권에서 문교부장관도 하고 지금 민주당 정책위 의장으로 장관도 마구잡이로 나무라는 이해찬이가 큰 건을 잡았다고 앞뒤 확인도 해보지도 않고 국회에서 방방 뜨던 그 사진말입니다. 공수부대원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 사진이라고 몇번을 강조하던 그사진... 저는 첫눈에 그건 복장도 구형공수복이고 총도 카빈에다 군화와 여러가지를 볼 때 울진 삼척 지구 간첩들을 사살하고 찍은 사진이라고 알아보았는데 (국민학교때 광화문에서 전시도 했었던 사진이고 신문사에서 발행되는 사진전집에도 매번 실리는 사진이죠!) 그래서 신문사에도 전화까지 해주었는데 그게 밝혀지고 제대로 알려지기까지 무려 일주일이 더 걸렸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내가 그렇게 얘기하면 이상하게 전라도 분들은 무조건 안믿으시더군요. 서울 안갔다 온 사람이 이긴다는 속담이 그래서 생겼나봐요. 나만 이상한 놈이라고 그러더군요. 공수부대 안갔다 온 놈이라고 하고... 하하하 그땐 참 어이가 없더라구요. 그렇게 방방뜬 이해찬이도 사과 한마디 안하고 사진만 빌려준 사이비 기자인지 기자 놈만 감옥에 갔었죠. 그 친구도 사실 공수부대 일반병 출신이었어요. (7공수) 청문회 전에 예비군 훈련에서 몇 번 봤었지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공수부대 출신들만 따로 각지역의 공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남앞에 나서기를 굉장히 좋아하더니 결국 가짜 사진 팔아먹고 곤욕을 치루었더군요. 하지만 공수부대의 거의 모든 장기하사관 및 장교들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해병대 출신과는 조금 다르지요. 그들의 기질은 화끈하지만 공수부대의 장기하사관이나 장교들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이건 제 친그들 중에 해병대 출신들도 있는데 그들도 공감을 하는 부분이예요. 예전 여의도에서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하신 분들은 다 인정을 하실 겁니다. 해병대는 편제가 병위주로 되어 있기때문에 그럴겁니다. 일반병 출신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무튼 얘기가 옆으로 조금 비켜나가고 있는데 국민들이 언론이나 방송에만 현혹되어 잘못된 것을 마치 잘된 것처럼 알고 있지 말라는 것이고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보도만을 가지고 그게 전부인양 차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량한 국민들만 속고 또 속고 망하고 또 망하고 아파하고 또 아파하고 하는 것이지요. 이건 한가지 예입니다.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여러분만이라도 한 족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내세우는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상대의 주장도 들어주고 아! 그런 상황도 있었구나라고 느끼고 공감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사회와 국가가 건전하게 견제하면서 발전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05/05/18 23:50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그런 의견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 했을 뿐, 그렇다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시민군이 시민을 쏴죽였다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제가 말하지도 않은 사실 때문에 비난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군인들끼리 쏴죽였다는 이야기부터 먼저 근거를 제시해 주십시오. 아니 이렇게 표현하면 악의적인 표현이 되니. 군인 희생자의 대부분이 군인들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자료의 근거나 좀 제시해주시죠.
05/05/18 23:52
글쎄요. 둘다 근거가 희박하고 앞으로 더 정확하게 밝혀져야할, 발굴되어야 할 진실이 아닐까요? 군인들이 오인사격으로 죽었든,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 수가 더 많았든, 현재의 시점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정치적'인 것 같습니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수가 많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고, 피해자 입장에서는 반대일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님의 발언, 또 김경남 목사님의 발언 모두 정확하지 않은 근거, 정치적 의도 면에서 명확하게 반대합니다.
카이사르 님에게는 개인적으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는 신념이 참 좋아 보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저항이 간디 식의 '비폭력 저항'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간디의 평화적인 저항을 높이 사고는 하지만, 그건 이미 기득권 계층의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일종의 '프로파간다'입니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쪽이, 폭력적인 것보다는 평화적인 편이 물리치기도 쉽고 부담도 없거든요. 저항하는 쪽에서도, 폭력을 행사하면 더 큰 폭력에 죽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무력 사용은 참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간디 덕분에 인도는 남들의 힘으로 독립을 했고, 아직도 분열, 빈곤에 허덕입니다. 그래도 '비폭력, 평화'를 외치실 셈입니까? 존경합니다.
05/05/18 23:58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이라는 이름의 광주 지방검찰청이 작성한 정부 공식 문서에 의하면 카빈 소총에 의한 희생자 26명. 1980년 국방부 보고서에 의한 카빈 소총에 의한 희생자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이것 말고도 다른 자료도 많았는데, 지금 자료를 찾으려니 힘드네요.
05/05/18 23:59
카이사르님//
댓글중에 (2005-05-18 22:12:30) 이때 쓰신 댓글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 분명히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민간인 희생자들 중 상당수가 카빈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민간인 희생자가 분명 진압군을 의미하는것은 아닐겁니다. 또한 카빈 소 총은 당시 진압군이 모두 m-16으로 무장했으므로 카빈소총에 의한 살해 는 곧 시민군에 의한 살해를 의미하게 되는것이라고 보는것이 맞겠죠. 이것이 일반적 오타라면 할말이 없지만 카이사르님께서 주장하는 바라면 이것 광주민주화운동을 다시 봐야할 증거가 아닙니까.?
05/05/18 23:59
옮겨오신 글 중에 우스운 대목 하나. 당시 광주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수십만이 될까 말까입니다.
광주 시민이 전부 충장로로 뛰어나왔으면 모를까, 과연 그랬을까요? 그바닥 가보셨다면 얼마나 좁은 지 아실 텐데요. 자그마한 오류 하나 만으로도 그분의 증언은 믿음이 가지 않네요. 특히나 직접 사태를 지휘했던 '범죄자'라는 건..
05/05/18 23:59
뭐 약간 흥분한감도 있었는데 하여튼 좋읍니다. 5.18을 불법으로 무법으로 보는 분들께 한마디 드립니다. 당신들이 누리는 그민주주의는 불법으로 매도되 날아온 최루탄에 얼굴이 부서진 어린 중학생과 머리가 쪼개져 죽어간 대학생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조차 분연히 떨쳐 일어선 시민들의 그 불법 무법이 있었기에 된거라는것을 지금도 일부지역 일부계층에선 그들을 폭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당신들이야 말로 그들 덕분에 이민주주의사회에서 살고있다는 것이 바로 사실이라는겁니다.
05/05/19 00:03
카이사르님//
1980년대 자료는 솔직히 신빙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쿠데타세력이 정권 을 잡아 언론통폐합에서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우한 3s 정책 까지 펼정 도로 자신들의 의도대도 나라를 조정했던 시기 입니다.. 당시의 자료가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듯 합니다. 언론의 감시, 국민의 감시, 올바른 감찰기관의 감시가 전혀 없었던 당시의 자료들은 내놔도 설 득력을 갖기 힘들지 않을까요?
05/05/19 00:06
네. 저도 그래서 사실은 언뜻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겁니다.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조사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광주사태 - 광주사태라는 말이 듣기 싫으시면,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겠습니다 - 에 대해서 제가 쓴 글은 그냥 하나의 의견일 뿐입니다. 그냥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제법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5/05/19 00:08
카이사르님께서 인용한 글에서 진압군의 입장에서도 바라봐달라는 의견에는 어느 정도 동감을 합니다만, 몇가지 의문이 가는 점이 있습니다. 518 당시에 간첩(내지는 폭동을 고의적으로 조장하는 세력)이 실재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요. 이 글은 분명 당시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 것만을 쓴 것으로, 일반 시민들의 무고한 희생들은 모두 불순분자의 짓이라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필자가 얼마나 사실에 근거해서 이 말을 언급한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 게다가 물에서 어린 아이가 수영을 하다가 총을 맞고 죽은 사례나, 길가던 버스를 통째로 대규모 병력이 총을 난사해버린 사건 등을 모두 불순분자의 짓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요.
05/05/19 00:11
오인 사격은 분명히 실재했던 사실입니다. 1980년 5월 24일 광주시 송암동 효천역부근에서 11공수 63대대가 나타나자 이들을 무장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보병학교병력이 90mm무반동총등으로 집중사격을 가했고 이에 63대대가 응사하면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사건에서 사망 9명 부상 33명이 있었고 부상자중에 다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05/05/19 00:15
카이사르님 같은 생각을 가진분이 제법있는건가요..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제시대독립투사에 비슷한 느낌으로 대하고있는 저로서는.. 극히..매우 극히 이길 바라게되네요 개인적군복무경험에 의해 조금 생각이 굳어지신건 아닌지 여쭙고싶네요.. (왠지 차라리 슬픈느낌이들뿐, 개인적으로 공격할려고 드리는 말이 아니구요..)
05/05/19 00:17
네. 그래서 저는 양쪽의 의견을 모두 들어보자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인용한 글에서, 진압군으로 참가했다는 그 분의 수기를 액면 그대로 모두 믿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도 사람마다 하는 이야기가 모두 틀린데, 감정이 격해질대로 격해진 당사자로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무슨 목사 말마따나, 계엄군이 잔혹하게 광주 시민들을 눈에 보이는대로 학살했다는 식의 주장은 분명히 거짓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서로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자 뭐 이런 것이죠.
05/05/19 00:53
카이사르님 같은 분의 의견도 존중하지 못한다면, 25년전의 광주인들의 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별로 진전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카이사르님이 못찾은 자료가 이런 것은 아닐지요? 즉시 검색해봤는데 이런 글도 있더군요. 글이 길어서 링크만 붙입니다. 요점은 당신은 윤상원이 누구인지 아는가?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essay/yoon_518.htm
이런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비판하는 것이 먼저 해야할 일이 아닐지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80년의 광주사건의 해석이 달라져왔던 것은 사실이니까... 후세대가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사실 관계의 확인입니다. 가능한한 다양한 루트, 해석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05/05/19 01:00
데모 님 글......결국 광주민주화 운동은 그저 반란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권력을 얻으려는 정치가들이나 일부 세력이 광주 시민들을 선동해서 일으킨 란으로 말이죠. 그리고 계엄에서 총을 드는 것은 죽여달라는 말이다, 라. 그럼 죽기 싫으면 얌전히 해산하고 각자 알아서 살아라는 뜻으로 보이네요. 12.12는 쿠테타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민주국가고요. 이 관계를 이해하시죠? 그런데 죽기 싫으면 그냥 가만이 있으면 됐는데 괜히 날뛰어서 죽었다라고 하시는겁니까. 평화시위요? 좋죠. 그런데 그때 평화시위가 통할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네요. 간디의 반폭력주의, 네 좋습니다. 그래서 얻은게 무엇이죠? 차라리 독립군보고 왜 총질하고 일본인 쏴죽였냐, 평화시위를 했어야지. 안 그랬으니까 일제가 조선민을 학살한 거 아니야, 라고 하시죠. 언제까지 기억할꺼냐고요? 대한민국이 지속되는 한 기억해야죠. 당연한 것 아닙니까. 결국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은 사회혼란기에 일어난 단순한 민란인데 뭘 다시 끄집어내서 이야기하고 기억하냐는 것인지요. 당시 집권자들은 시위가 과격하고 무장까지 해서 어쩔 수 없이 사살한 것이라는 말인지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한가지, 사실 확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은 공감입니다. 당시 권력층의 왜곡과 소멸로 객관적인 자료도 부족하고 있는 자료마저도 신빙성이 높지 못한 상황이죠. 시민군이나 진압군이나 자신들의 속한 위치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개인적 진술도 확실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진실 규명은 정말로 필요한 상황이라 할 수 있죠.
05/05/19 01:09
[다음 아고라 통신방]은 추천수 조작으로 원하는 글을 상위에 올려놓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네이버 검색은 역시 돈을 받고 우선적으로 자사가 선택한 정보를 배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주 518 사망자]로 google로 검색했더니 가장 위의 2링크가 나왔습니다. http://brd3.chosun.com/brd/view.html?tb=BEMIL079&pn=5&num=3159 유용원의 군사세계 하나는 저자가 목사로 되어있고, 하나는 출처가 조선일보네요. 둘다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글이 버젓이 검색 상위에 있다는 것이겠죠. 어쨋던 유용원 씨 링크의 당시 현장 사진들은 못보던 사진이라 꽤 참고가 되었습니다.
05/05/19 01:21
당시 12.12 이후 계속된 시위로 시민들의 의사는 충분히 표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시위는 과격해졌고, 양 김씨가 말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죽고 흥분한 광주시민이 약30만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이건 광주사건 옹호자의 주장입니다)
광주사건은 부마사건과는 완전 성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간첩단이 개입한 것은 아닌가란 의심도 받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시위라면 계엄상황에선 자진 해체해야 맞습니다. 해방후 한국 사회에서는 시민이 관공서를 공격해서 무장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후 데모에서 종종 파출소 습격같은 것은 있었어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해방구 선포라니요? 독립국인가요? 당시 시민자치, 무정부 상태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게 정치세력화 시킨 배후세력이 누구냐는 것이죠. 이 사회에는 분명 간첩이 있습니다. 저 위의 2 링크가 전두환을 옹호하기 위해 일부러 자료를 조작하는 세력이라면? 우리가 그들을 수구세력이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반대 입장에서 사회혼란을 부추키는 세력 또한 있는 것입니다. 80년 광주의 상황은 일반적인 시위의 상식을 벗어났습니다. 광주가 독립했나요? 독립군과의 비교, 항거권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님 같이 생각하는 분들 이 사회에 많습니다. 드러내놓고 말하면 이처럼 집단 공격을 당하니까 조용히 있을 뿐이죠. 당시 시위 주동자, 진압 군인 모두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담도 하지 않았는데 희생당한 시민이 억울하고 이들이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애도하는 것이지 시위 주동자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해 죽어간 것이므로 특별히 애도하지는 않습니다.
05/05/19 01:36
(2005-05-19 01:31:44)
http://www.yu.ac.kr/community/plaza/plaza_06_read.php?category=2&seq=139594&keyfield=name&key=滿山枯木一枝靑&page=1&mode=search 5.18 광주 민중항쟁 사건일지 (시민군 옹호측 주장) 1979.10.26 박정희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하여 피살,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전역 계엄령 선포 12.12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군부내에서 쿠데타를 일으킴.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 체포됨. 휴전선 전방부대가 불법으로 이동. 1980.4.14 혼미정국 계속되는 가운데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함과 동시 보안사령관 겸임을 유지. 4월 중순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범위한 학원가 시위와 노동쟁의 시작됨. 5월 초순 데모 계속 확대, 계엄철폐와 전두환 퇴진 요구. 5.15 서울중심가 5만명 시위, 신현확 총리 민주화 가속화 약속 5.16 광주금남로에서 3만명의 학생과 시민 평화적 시위 및 횃불 시위. 양김씨 데모자제 요구, 정부측 답변을 듣기로 함. 5.17 전국적인 계엄선포. 모든 정치활동 금지, 대학폐쇄, 정치인 재야 지도자 학생 등 체포구금 5.18 광주에서 1,500여명의 학생들 계엄철폐와 전두환 퇴진 요구 시위 시작. 공수부대에 의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십명의 사망자 속출 5.19 광주에 주둔한 군인들의 구타, 총칼질, 무자비한 진압, 학살이 시작됨. 시민들이 군인들의 만행에 충격을 받고 청년·학생에 합세, 이때부터 민중봉기 형태로 바뀜. 5.20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소식이 퍼져나감. 10만 이상의 광주시민들 항거에 나섬. 5.21 30만명의 대집회 및 항거. 데모대 군차량 징발 및 무기획득. 군대 시내에서 철수. 전화통화 차단됨. 밤 12시경 시위대 도청 점령. 5.22 시민들 광주 장악. 1만여명 군대 광주외곽 포위. 시민위원회 구성, 군부와 협상시작. 전남 전지역으로 시위 확산됨. 수천명 사망설 퍼짐. 5.24 광주의 5만 시민 우중 시위 감행, 광주의 외곽출입 금지 5.25 3만시민 도청 앞 광장에 집결, 시민위원회의 입장 공식화를 위한 집회. 투항이냐 계속 투쟁이냐, 강온으로 갈라져 갈등이 심각해짐. 5.27 수천명의 군인이 탱크를 몰고 시내로 진입, 군부가 통제권 장악 5.28 수천명 체포 연행·구금·그리고 살해....수배시작·김대중 등 사형선고 사망자 : 154명 행방불명자 : 70명 부상자 : 3,193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 1,589명 총 5,006명 중 중복인원 694명 제외 총계 : 4,312명 당시 무장봉기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받고 사형까지 언도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이 복권되고 끝내 대통령까지 하고, 615공동선언하고 북한에 퍼주고 노벨평화상까지 타고... 좋게 보는 쪽에서는 한없이 좋게 보이겠지만, 과연 진실은 그게 다인가?란 생각이 드는군요. 분명 광주 시민들은 죽지 않아도 되었는데, 결과는 죽게 되었습니다. 누구 때문일까요? 분명 광주사건은 한국 현대사에 있었던 다른 시위와는 그 내용이나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같은 군사쿠테타라도 516 때는 광주사건 같은게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05/05/19 01:51
연도를 보니 계엄령 선포 이후에도 전국적인 시위가 있었군요. 정상적인 시위하면 계엄령 선포 이후에 자진해산 했어야 한다고요. 부마사건은 계엄령 이후에 일어난 일 아님니까? 네 저도 반북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간첩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이후 혼란기에 활동이 없었다고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간첩들의 행동에 의한 사건으로 몰고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주에서의 시위가 이러한 유혈투쟁으로 변모한 것에는 군부대의 진압이 원인이 된 것이죠. 5.16때 박정희는 쿠테타 후에 당시 시위를 하던 시민들과 타협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죠. 하지만 유신헌법으로 영구독재의 의욕을 보였고 그에 의해 대대적인 반항을 샀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쿠테타를 일으켰죠. 이번에는 달래려 하지 않고 계엄령 선포하고 해산하라고 으름장을 노았죠. 이 두 사건은 엄연히 시기적, 정치적 배경이 다릅니다. 군사 쿠테타를 통한 정권 획득이란 측면에선 같지만요.
네, 위에도 말했듯이 확실한 사실 규명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불과 20여년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도 설과 증언만 난무하고 객관적인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암울한 면이겠죠.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많은 광주 시민이 죽었던 것은 쿠테타로 권력을 획득하려든 독재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05/05/19 03:36
5.18 당시 군부정권은 정통성을 가진 정부가 아닌 쿠데타를 일으킨 도당들이며 헌법질서를 정지시킨 반국가적 무리입니다.
정당성을 가진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열심히 열거하신 "민란"의 종류가 아닌 시민에 의한 정당한 항쟁입니다. 객관적 사실을 열거하여 일제시대에 일어난 여러 항쟁과 거사, 의사와 열사를 "폭동"이나 "암살" ,"폭도""살인자"라 하시겠습니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사실관계"를 따져 보면 정부의 공표자료와 시민들의 구전입니다. 한쪽은 "조작"이라 하고 한쪽은 "허구"라 합니다. "허구" 라 했던 자료는 유해발굴이나 외국자료에 의해 발생시점부터 해마다 사실이 첨부되어 오고, 발표된 자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치가 변합니다. 무엇을 진실로 믿고 싶은신가요? 광주묘역에 한 번 가보셨나요? 말없이 잠든 수많은 비석의 주인공... 이보다 더한 "역사적 사실관계"가 더 어디 있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만에 하나 ... 또다른 어떤 세력이 정통성을 뒤엎고 대한민국이란 나라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면 그때도 이런 말로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시겠습니까? 카이사르님과 같은 의견은 과거 20년동안 우리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국민절대 다수가 믿었던 거짓된 망령이 다시 살아나는 현실이 참 ...
05/05/19 11:58
데모//카이사르님 같은 분의 의견도 존중하지 못한다면, 25년전의 광주인들의 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별로 진전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저 같은 한국 국민이라는 데 대해서 역겨움을 느낄뿐이죠. 위대한 대머리 장군님 좋다는 데 어쩌겠습니까
05/05/19 13:33
처제테란님//카이사르님은 전두환 장군이 좋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의 글을 다 읽어보시지도 않으셨군요. 최소한 상대방이 쓴 글은 찬찬히 시간들여서 글자 그대로 읽으시고, 자기 멋대로 판단해서 비난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장문이라서 읽기 싫으시다면 댓글도 달지 마시고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남을 비판하는 것. 후회되는 행동이 아닐지요?
05/05/19 16:52
저는 광주에 살지만 광주에 살고 있는 시민들조차 벌써 1980년 5월의 일을 벌써 잊어버린 것 같더군요.. 5월 18일 날 학교 등지에서 하는 각종 행사도 별 의미없는 관례행사에 불과하게 되버린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05/05/20 08:05
카이사르님//정당한 저항권행사였느냐 아니냐를 놓고 사실규명과 합리적 해석과 판단을 하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님에게는 정당한 저항권행사였더라도 폭력적여서는 도로아미타불이다 라는 인식이 깊이 자리잡고 있는듯 합니다. 여기서부터 생각이 갈리므로 제가 개략적으로는 말씀드리겠지만, 스스로 저항권에 대해서 더 알아보시고 생각해 보시는것이 좋을듯 합니다. 민주주의에서의 저항권은 폭력적수단을 배재하지 못합니다. 그리한다는것은 독재정권의 용인과 직결되기 때문이죠. 또한 쿠데타후 지들멋대로의 해석등과 같이 성공여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성공하면 민주화운동 실패하면 반란 이런것 결코 아니란것이죠. 유혈의 비극을 낳았더라도 이후 저항권이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이상이 민주주의헌법이 규정하고 해석되는 바입니다. (참고로 전 법전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오직 논쟁의 초점은 정당한 저항권발동였느냐 아니냐만으로 귀착되어야지, 그래도 폭력을 사용했으니까, 실패했으니까..등으로 새어서는 곤란합니다. 결국 주체가 국민이었는가, 다른수단은 없었는가 이 둘을 놓고 봐야하는데, 국민이 워낙에 무지몽매해서 누군가의 사주에 의한것이건 아니건 당시 전국적인 시위의 주체가 국민였다는것과 광주시민들도 그들중 일부였다는 것은 아실테고, 6개월간의 계엄상황, 그에대한 시위및 정부에 답변요구, 17일 밤 진압군투입. 이미 여기까지에서 어느쪽이 먼저 사상자가 발생했건간에 다른수단은 봉쇄되었다 볼 수밖에 없으므로 이시점부터는 저항권이 인정될수 있는 상황이라 보는게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4~5월 지속되온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들을 더욱 강력한 국가긴급권으로 틀어막았기에 시민불복종(카이사르님께서는 저항권을 이개념과 매우 혼동하시는 듯 합니다.또한 생존을 위한 소극적 정당방위와도..)의 차원마저도 넘어섰기에 명백성,보충성,최종성등의 요건이 확보된다 봅니다. 카이사르님의 반론 기다리겠습니다.
05/05/21 02:03
카이사르님 우습군요. 간첩의 사주라뇨?? 소위 말하는 북괴 간첩의 사주를 받는 사람들이 애국가 부르고 태극기를 몸에 둘러 맵니까?? 18일에 독일인 기자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습니다. 그걸 보고 희생자가 시민군의 총에 맞고 생겼는지 잘 생각해 십시오. 수단이 정당하지 않다구요? 일반 시민한테 대놓고 두들겨 패는 군인과 그걸 지시한 지휘관은 정당한 건지 한번 잘 생각해 보시죠.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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