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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03/26 23:17:37 |
Name |
Timeless |
Subject |
[소설]본격 로맨스 '미 소 천 사' #14 |
- 제 14 화 -
"삐리리리리"
나를 닮아 식상한 벨소리. 평소에 전화가 자주 오는 편이 아니라 전화벨 소리를 반가워 하는 편이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 소리를 듣는 것이 편치가 않다.
액정에 '소희씨' 이름이 뜨기 때문이다. 바람 피운 것이 아니라고 곱씹어 보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생각한 사람이 소희씨가 아니라 그녀였다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다..
여보세요
'정후씨~ 지금 어디에요?'
친구 만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앗! 아직 집은 아니구나. 들어가기 전에 잠깐 시간 되요?'
집에서 여우같은 아내랑 토끼 같은 애들이 기다리는데..
'그럼 바람피러 나오세요'
뜨끔했다. 괜한 농담을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그 정도에서 말장난은 그만두었다.
소희씨는 어머니 몸상태도 좋아졌고 그래서 나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아침에는 어머니도 아프고, 나도 못만나게 되어 우울했었는데 이렇게 두 가지 좋은 일이 생겼다며 들뜬 목소리였다.
오늘은 부평에 있는 영화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영화라.. 정말 오랜만에 보는 영화다. 더구나 예쁜 여자친구와 함께라니..
그녀가 저만치서 손을 흔든다. 오늘은 하얀 원피스에 핑크 빛 가디건으로 여성스러운 모습이다. 정장 차림의 평소 그녀 모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눈이 가는 것은 그녀의 밝은 미소다.
죄책감을 느껴야 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의 미소는 그런 것이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그녀는 그런 미소를 나에게 지어 준다.
'정후씨 어떤 영화 보고 싶어요?'
음.. 요즘 무슨 영화가 하는지 잘 몰라서...
'짠~ 그럴줄 알고 이렇게 티켓을 사놨지요. 대신 저녁은 정후씨가 사야해요.'
다행이다. 소희씨는 '우리 오늘 뭐 할까', '밥 뭐 먹을까', '영화 뭐 볼까' 등을 남자에게 다 맡겨버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연애 초짜인 나의 짐을 덜어준다.
영화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라는 제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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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벙해 보이는 한 남자와 똘똘하고 너무 귀여운 그의 어린 아들. 그들에게 생기는 6주간의 기적과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한 고등학생에게 빵 집 아저씨가 케익을 전해주면서 '이제 우리 문 닫는다. 하지만 다행히 약속은 다 지키게 되었다' 라는 말을 남기면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무엇일까..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그 고등학생이 6살때로 1년 전 엄마를 잃고 아빠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가 남긴 동화책에는 '죽은 자들이 사는 아카이브 별에서 비의 계절에 돌아올거야'라는 내용이 쓰여 있고, 아이와 아빠는 그 말을 믿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비의 계절, 장마철이 시작된다. 숲 속 무너진 낡은 건물터에서 아빠와 아들은 그녀를 만나게 된다.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 그러나 그녀는 그 둘을 기억하지 못한다. 셋은 집에 와서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기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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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 거리고,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희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마지막 해바라기들 사이에서의 키스씬을 그녀는 눈이 촉촉하게 젖은 채로 감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영화 이야기' 였다. 카레 전문점에서 우리는 주방장에게 미안하게도 카레 라이스의 맛에 대한 것보다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정후씨. 그 두 사람 너무 예쁘죠?'
네. 그런데 남자가 꽤나 어벙해 보이더니, 비현실적인 것도 그냥 믿어버리네요.
'에? 나는 그 남자에게서 정후씨를 느꼈는데.. 그리고 그 사람은 어벙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순수한 거에요. 정후씨같이.'
나는 순수하지 못해요. 소희씨.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드러나며 그녀가 말을 한다.
'하긴. 아까 마지막 씬에 그 두 사람 키스할 때 나 훔쳐봤죠? 부러웠나 봐요 정후씨. 응큼하게'
지금 내 앞에 거울이나 유리창이 없지만 내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매일 저녁밥 같이 먹기로 했는데 오늘도 지켰네요. 뿌듯하다.'
영화도 좋았고, 저녁도 잘 먹었네요. 정말.
'정후씨~ 내일도 우리 약속 지킬 수 있나요?'
내일이라... 내일은 그녀를 만나러 가야 한다. 소희씨 앞에서 그녀를 떠올리려고 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녀에게 느끼는 내 마음은 소희씨에게 느끼는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이 구별할 수 있는 것이지, 소희씨나 다른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바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휴..
소희씨. 내일은 일이 생겼어요. 미안해요.
'흐음~ 알았어요.'
'대신에 다음 번 부터는 '일'이라고 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도 같이 말해줘요. 아까처럼 '친구' 만나고 온다고만 하지 말고 '어떤 친구'인지도 말해줘요.'
그녀와 나는 그렇게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그녀에 대한 문제로 나와 그녀의 애정도 테스트를 한다면 '완전 남남'이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녀 말처럼 그렇게 서로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알았어요. 소희씨도 그렇게 해줘요. 나도 소희씨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어요.
'싫어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놀랐다.
'만날 때 마다 한 가지 씩만 알려줄거에요.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싶으면 그 만큼 많이 만나야 해요. 오늘은 우리 가족 이야기. 3남 1녀 중 막내에요. 얼마나 이쁨 받고 자랐는지 알겠죠? 나 괴롭히면 우리 오빠들이 가만히 안둔답니다.'
조심해야겠네요. 정말.
'정후씨는요?'
외아들이에요. 부모님은 지난 번 얘기 했죠? 혼자 산지 꽤 됐네요 이제..
내 말을 듣고 나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던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그녀에게 이끌려 간 곳은 사진관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진가와 함께 커튼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플레쉬가 계속 터진다.
그러다 커튼 사이로 그녀가 나를 손짓해 부른다.
'이제 우리둘 사진찍어요'
평소 사진 찍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들 중에 특히나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나서의 사진은 어디 구석탱이에 살짝 나온 것까지 다 합쳐도 앨범 한 권을 다 채우지 못한다.
평소 어정쩡한 자세와 표정으로 서있으면 보통은 사진가가 교정해주기 마련인데 오늘은 다른 교정자가 있었다. 바로 옆에 말이다.
'정후씨 아까 영화에 나온 가족 사진 생각해봐요'
나보다 더 엉성한 표정의 남자도 귀여운 아들과 예쁜 아내와 함께하는 행복 앞에 멋진 미소를 짓는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찰칵
그녀와 나는 사진관 안 쇼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사진을 많이 안찍어봐서 봐서 몰랐는데 요즘은 1시간 안에 현상이 된다고 한다.
'자~ 다 됐습니다. 보세요'
그녀가 수십장이나 되었다. 미소 짓고 있는 그녀, 활짝 웃는 그녀, 뾰루퉁한 그녀, 슬픈 표정의 그녀, 귀여운 표정의 그녀 등등...
그리고 마지막 우리 둘의 사진.
영화 장면 생각하는 도중에 사진을 찍었었다. 그런데.. 사진 속의 나는 꽤나 잘 나와 있었다. 이 사진만 보면 사람들도 나를 꽤나 멋진 남자라고 생각해줄지도 모를 정도로 잘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면 나에 대한 평가는 한 마디 정도겠고 내 옆의 그녀에 대한 이야기만 할 것이다. 그녀는 보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둘이 나온 사진은 지갑에 들어가는 사이즈로 한 장씩 나누어가졌다. 그리고 나머지 사진에 대해서 그녀가 이야기했다.
'정후씨. 이제부터는 집에서도 나를 봐요. 재밌는 일이 생기면 웃는 나를 보고, 마음이 울적해지면 격려하는 나를 보고, 심심하면 바보같은 표정 하고 있는 나를 봐요. 그리고 전화로 내 목소리를 들어요.'
소희씨 나랑 같이 살려는 거에요?
'아! 정말 그럴까?'
하면서 그녀는 웃는다. 내 농담은 그녀 앞에서 무너진다.
집에 돌아와서 그녀 사진을 이곳 저곳에 붙였다. 냉장고를 열면서도 그녀를 보고, 식탁에 앉아서도 그녀를 보고, 침대에서도 그녀를 본다.
다만 화장실에는 붙이지 않았다. 이유는.. 뭐..
그리고 그 날 밤 소희씨와 첫키스를 했다.
많은 소희씨 중 침대 옆 소희씨에게 말이다.
- 제 14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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