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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03/23 22:21:39 |
Name |
Timeless |
Subject |
[소설]본격 로맨스 '미 소 천 사' #12 |
- 제 12 화 -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지하철이 들어온다. 물론 퇴근시간의 지하철이다. 나와 함께 그 열차 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사람들이 다 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하철 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열차 안에서 그녀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그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결국 그녀의 편지는 꾸겨지거나 혹은 놓쳐서 밟히고 말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회사에서 틈틈이, 퇴근 후 지하철역까지 걸으면서,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녀의 편지를 계속 읽었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찬 열차 안에서도 그녀를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의 편지를 내 머리에 또 내 마음에 옮겨 적었다. 이제 열차 안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편지를 읽으려는 나를 도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 놓고 그녀의 편지를 읽어본다.
나는 대학 때의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알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분명히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있었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5년이나 걸렸다. 그것도 내 스스로 알아차린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도 둔감한 나를 그녀는 항상 지켜봐 주었고, 또 좋아해주었다.
그런 그녀가 저만치 앞에서 나에게 손을 흔든다.
“정후씨 더운데 왜 뛰어와요? 나 안 도망가는데~”
헉헉.. 왜 이렇게 일찍 나와있어요? 나 소희씨 기다리게 하면 안되는데..
5년이나 기다리게 했는데 더 기다리게 하는 것은 정말 해서는 안 될 짓으로 여겨졌다. 그녀가 손수건으로 내 이마의 땀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내가 정후씨보다 일도 더 일찍 끝나고, 약속 장소도 가깝잖아요.”
그녀가 한 손으로는 내게 손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 기다리게 해도 되요. 나는 정후씨 기다리는 시간도 데이트 중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정후씨 기다리는 동안 정후씨만 생각하고, 만나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거든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방금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지나쳐온 역들의 팻말이나 내 주위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만을 생각했고, 그것은 나 역시도 두근거리고, 즐거운 데이트 시간이었다.
어느덧 또 그녀를 기다리게 했다는 나의 자책은 저기 멀리 아마존의 정글 어느 곳으로 보내졌다. 단지 나의 땀을 닦아 주는 손수건이 보송보송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한 손 부채도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우리 모교에 놀러 가요.
오늘은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이끌었다. 다른 때와는 다르게 그녀의 눈이 안보일 만큼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나를 따랐다.
왜 그래요 소희씨?
“편지 읽었구나 정후씨.”
네. 읽었어요.
그녀는 그 편지를 읽고 난 후의 내 반응이 걱정되는가 보다. 멈추어 서서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소희씨 고개 들어요. 나 아까부터 소희씨 얼굴 정말 많이 보고 싶었는데, 예전 대학시절에 못보고 지나쳐버린 것이 너무 아까워서.. 고개 들어봐요 소희씨.
그제서야 그녀가 고개를 든다. 양 볼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대학 시절의 그녀의 모습이 이랬을까? 그렇다면 더더욱 아깝다. 그 때 그녀를 몰라본 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사진이라도 찍으려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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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마찬가지의 분수 앞 벤치.
그리고 과거와 마찬가지의 한 남자와 한 여자.
과거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 때와는 다르게 성숙해져 있는 두 남녀가 같은 벤치에 함께 앉아 있고, 또 여자만 남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두 남녀가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변하는 것은 사람뿐인 것일까. 분수나 벤치는 정말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많이 변한 내가 역시나 많이 변한 그녀를 바라보다 보니 그 때의 나를 책망하는 말투가 되어 버렸다.
소희씨, 내가 참 답답했겠어요. 이렇게나 가까운 옆 벤치에 소희씨가 있었는데..
내가 즐겨 앉아 있던 벤치와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는 내가 한 발이면 닿을 수 있을 만큼 아주 가까웠다. 그런 그녀와 나의 거리가 그녀에게도 참으로 멀었고, 나에게도 참으로 멀었다.
“그때는 말이죠. 내가 얼마나 소심했는데요. 혹시나 정후씨가 눈치 챌까봐 조마조마 해서는 가끔 정후씨가 내 쪽을 돌아볼 때 고개도 숙여보고, 괜히 다른 곳으로 가버리기도 했었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그 때를 추억한다. 나는 그 때 그랬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와 같은 추억의 페이지를 찾으려 과거라는 책을 뒤적여본다.
그러다 나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그 순간 과거라는 책의 마지막 장이 끝나고 새로운 책의 장이 열렸다.
아직은 하이얀 페이지였다. 그 새로운 장은.
- 제 12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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