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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03/22 18:29:04 |
Name |
Timeless |
Subject |
[소설]본격 로맨스 '미 소 천 사' #11 |
- 제 11 화 -
“때르르르릉”
어김없이 시계는 오늘도 울린다. 하지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울린다. 매일 아침 그녀와 만나게 되는데 급하게 나가느라 또 다시 슬리퍼를 신고 나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츄리닝 차림에 잠이 덜깬 모습이었지만 왠지 표정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가장 아끼는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도 신경 써서 골라본다. 혹시나 슬리퍼가 아닌가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산 가방을 옆에 끼고 옥수수 식빵을 입에 물고는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나서도 간간히 창문에 얼굴을 비추어 보며 머리를 다듬는 안 하던 짓까지 한다. 이제 곧 그녀가 탄다.
“이번 역은 부천, 부천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오늘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이윽고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가고, 또 들어오는 와중이라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나는 쉽게 그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feel이 통해서...는 아니고 내가 사준 머리핀이 보였다. 이런 인파속에 그녀가 나를 찾기는 힘들 것 같아서 내가 그녀 쪽으로 다가 갔다. 역시나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상당히 난감해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팔을 잡자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아! 정후씨.”
약간 놀란 듯한 하이톤의 예쁜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침 러시아워의 고통 따위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 그녀를 위해 사람들 틈에서 간신히 공간을 확보했다.
휴~ 오늘은 사람이 많네요.
“네. 그래도 다행이다.”
응? 뭐가요?
“사람들한테 밀리면 정후씨 잡으면 되고, 정후씨가 있으면 이상한 짓 하는 사람도 없을테고. 그리고..”
그리고?
“정후씨 보면 이런 러시아워도 좋거든요 나는. 헤헤”
아.. 나에게 있어 그녀의 의미와 그녀에게 있어 나의 의미가 많이 비슷한가 보다. 나도 소희씨 때문에 하나도 안 괴로운데 이 러시아워라는 것이..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쑥스러워서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의 눈을 피했다. 큐빅이 박힌 머리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소희씨, 머리핀 잘 어울려요. 예뻐요.
“한 정거장만 더 기다렸다가 그때까지 그 말 안 나오면 나 실망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미소지었다. 처음에 그녀를 보았을 때는 활발한 커리어 우먼이란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 보니 그녀가 활발한 커리어 우먼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무엇이랄까.. 귀엽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애교가 참 많은 여자다 소희씨는..
“있죠~ 점심에 정후씨는 주로 뭘 먹어요?”
점심은 그러니까.. 그냥 가까운 식당에서 해결하죠.
“에~ 하루에 한 번 먹는 점심인데 먹고 싶은 것 생각해서 먹어야죠. 나는 오늘 점심에 닭도리탕이 먹고 싶어서 어디 갈까 고민 중인데~”
그러고 보니 나에게 있어 점심 시간은 그저 멋도 모르고 따라간 결혼식의 하객처럼 동료들이 가자는 식당에 가서, 동료들이 많이 시키는 메뉴에 내 것까지 추가해서 먹고, 쉬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점심 시간도 나와는 다르게 보내는 구나.. 그녀답다. 나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니 닭도리탕이 먹고 싶어졌다.
나도 먹고 싶어요. 닭도리탕이라~
“그럼~ 둘 다 닭도리탕 먹어요. 그리고 저녁에 닭도리탕 맛이 어땠나 얘기해요 우리.”
네. 그래요 우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가면서 나를 돌아보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후씨, 아직 가방 속 잘 안 살펴 봤죠? 이따 저녁에 봐요~”
가방 속? 아직 사람이 많이 타고 있어서 가방을 열어보기는 조금 힘들 것 같았다. 가방 속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꾸욱 참고 일단 회사로 향해 달리는 지하철과 수많은 사람들 틈에 내 몸을 맡겼다.
내 자리에 앉아 가방을 열고 속을 들여다 보았다. 아.. 편지.. 어느새 들어와 있는지 연보라색 편지봉투가 들어있었다. 아마도 가방 살 때, 점원의 괜찮다는 말에도 계속 가방을 만지작거리던 그 때일 것이다.
아직 업무 시작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재빨리 뜯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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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정후씨
여자한테 편지 받는 것 오랜만이죠?^^ 이렇게 팬을 들게 된 이유는 당연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에요.
정후씨는 우리가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줄 알죠?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요. 내가 정후씨 자주 봐왔다고.
있죠. 나는 정후씨 알아요. 세원대학교 중앙 분수 옆 벤치 기억나죠? 정후씨가 매일 점심에 앉아 있던 그 벤치. 그 벤치 옆에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정후씨는 모를꺼에요. 정후씨는 항상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곁눈질로만 보던 그 여학생이 대담하게 고개를 돌려서 정후씨를 바라볼 수 있었답니다.
2학년 때 처음 정후씨 보았을 때 정후씨는 날카로운 인상이었어요.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는 너무 열심히 해서 주위를 한 번도 둘러 보지 않았었어요. 그래서 정후씨 자리가 바뀌어도 근처에 항상 같은 여학생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겠죠. 그 여학생은 너무 소심해서 정후씨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도 못했고, 말도 못 걸어봤어요.
그리고 2학년이 끝나갈 겨울 길이 얼어붙어서 미끌미끌 했던 어느 날 그 여학생은 조심조심 걷다가 결국 미끌어져서 뒤로 넘어지려 했죠.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잡아주었어요. 그 여학생은 고맙다고 말하며 뒤를 돌아보다가 굳어버렸어요. 정후씨가 서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정후씨는 ‘조심해서 걸어요. 다치지 않게.’ 한 마디 남기고 앞질러 갔어요. 그날 밤 그 여학생은 잠을 한 숨도 이루지 못했답니다.
그 후에도 계속 그 여학생은 정후씨 주위에 있었는데 정후씨는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어요.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끝난 후에 다시 정후씨를 볼 수 있다는 들뜬 마음으로 정후씨 전용 벤치 근처에서 기다렸지만 정후씨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도서관에도 없고, 강의실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었어요 정후씨는... 그 여학생이 매일 정후씨를 찾다가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정후씨가 갑자기 군대에 갔다는 소식이었어요.
그 여학생은 울었죠. 자신의 소심함을 책망하고, 군대 가서 고생할 정후씨 걱정하고, 매일 정후씨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울었어요. 그렇게 얼마간 힘들어하던 그녀는 힘을 내었어요.
‘소심한 나를 바꾸자’ 그 후 그 여학생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어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고, 여행 동아리에서도 의욕적으로 활동했어요. 그리고 졸업식날 정후씨 전용 벤치 옆자리에 앉아 정후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은 곧 백화점 광고팀에서 일하게 되었고, 아침마다 지하철 1호선으로 출근했답니다. 그렇게 또 2년이 흘렀고, 어김없이 아침 출근 지하철에 탄 이제 회사원이 된 그 여학생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답니다.
한 시도 잊지 않았다는 말은 안 할게요.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에요.
나 말이죠. 너무 기뻤어요. 하지만 오늘만 우연하게 정후씨가 탄 것이 아닐까.. 그러면 내일부터는 또다시 볼 수 없는 것 아닐까. 소심한 나를 버렸지만 정후씨를 만나자 다시 소심해 졌나 봐요. 말을 해야 할 텐데. 그래야 다시 또 볼 수 있을 텐데. 이러고 있는 동안 회사를 지나치고, 정후씨 내리는 시청역까지 갔어요. 하지만 혼잡해서 결국 정후씨를 놓쳤고, 또 다시 나 자신을 책망했어요. 소심한 것 이제 다 벗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혹시나 하는 기대에 타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정후씨가 저만치 예전처럼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오늘은 말을 걸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너무 떨려서 또 말을 걸 수가 없었어요. 어제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했건만..
하지만 다행인 것이 그 후로도 매일 아침 정후씨를 볼 수 있었어요. 예전과는 다르게 정후씨는 날카롭지 않은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리고 그 주위에는 여학생이 아닌 한 여사원이 지켜보고 있었어요.
정후씨에게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와서 다행이에요. 놀라지도 말고, 나중에 나 놀리지도 말아요. 이제 저 잘게요. 내일 아침에 정후씨 만날 기대로 꿈에서 정후씨 만났으면 좋겠네요. 정후씨도 잘 자요. 안녕.
From. 임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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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다 읽고 나자 어지럽고.. 또 마음이 찡했다. 그녀는 나를 그렇게나 오래 알았던 것이구나.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아침 지하철의 러시아워 때 처럼 비슷한 정도의 의미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은 나의 크나 큰 착각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아주.. 많이.. 커다란 의미였다. 이 편지 하나로 그녀의 마음이 나에게 다 전달 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내 마음에 가득 차버렸다.
“어라? 정후씨 연애편지?”
김성훈 차장님이 외치자 직원들이 잠시 몰려들었다. 나에게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그녀가 저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에요.
사람들의 놀란 눈빛이 보였다. 내 반응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대답함에 있어 항상 어눌하게 얼버무렸던 나였기 때문이다.
“정후씨 변했는데? 아무튼 축하해~”
“정후씨 좋겠네요. 이야~ 신기한 걸~”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나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편지를 어루만졌다. 과장님이 들어오셔서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도 오늘의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왠지 의욕이 생겨서 지금까지 밀려왔던 일까지 마무리 지었다. 과장님도 오랜만에 내가 흡족한가 보다. 눈이 마주쳤을 때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그 냉철한 과장님도 오늘은 아주 좋은 분으로 보였다. 정신 없이 일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에 진동이 느껴졌다. 새로운 문자 메시지. 그 동안 나의 문자 메시지는 대부분 광고였는데 오늘은 왠지 기대가 되었다. 핸드폰을 열어 확인을 했다.
“점심 닭도리탕 맛있게 먹어요~ 후훗”
시계를 보자 어느덧 점심 시간이었다. 과장님을 쳐다 보자 일을 열심히 한 나에게 상이라도 주시려는지 한 마디 하셨다.
“점심 먹고 합시다”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내가 다가가 말했다.
오늘 점심은 닭도리탕으로 하죠. 자~ 가죠.
앞장서는 내 등 뒤에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진다. 문을 나서는 나는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거울 속의 내가 아니라 진짜 나의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 제 11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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