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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03/17 01:11:07 |
Name |
정일훈 |
Subject |
어쩌면 아무도 기억 못할지 모를 이 이야기를 지키려 애쓰는 사람도 있답니다^^ |
여러분, 정일훈입니다.
근 일 년 만에 또 이런 글을 쓰게 되는군요.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떠나며 과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황형준 PD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황형준 PD는 제가 떠나면 달라질 것들에 대해 정신이 팔려있더군요. 그런 친구에게 제 입장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니 못할 짓인 것 같아 그만 두었습니다. 대신, 다시 이렇게 자판을 두드립니다.
행복했던 날들
스타크래프트 중계를 시작한지 만 3년이 지났습니다. 게임 리그의 문을 열게 된 지도 벌써 2년, 여덟 시즌을 지났고 수천 게임의 중계를 했습니다. 분당의 투니버스, 그 골방 같은 스튜디오에서 어설픈 생방송으로 결승전을 시작했던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이제 장충체육관에서 결승전을 치릅니다. 고등학생이었던 골수 팬이 대학에 들어갔다는 이메일을 보냈더군요. 한 직장인은 아내 출산 중에 병원 TV로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보다가 장모님께 혼난 이야기를 적어주셨습니다.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저를 빙그레 웃게 만듭니다. 너무 호들갑스럽지도 않고, 남에게 굳이 자랑하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늘 저와 함께하는 이 만족감. 그것은 온게임넷 스타리그와 함께한 하루 하루가 저에겐 늘 행복했던 날들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행복감에 젖어있는 것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달라진 뒤 임에도, 맨 처음 시작하던 때의 포근한 감상에 젖어있는 제가 이제는 꿈에서 깨야 하는 것은 제가 행복해진 만큼 더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머물러야 할 때와 떠나야 할 때
사람마다 타고 태어난 재능이 있겠죠. 오래전에 읽은 초한지의 한 대목에는 ‘어려음을 함께 할 남자와 즐거움을 함께 나눌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초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읽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두 가지 타입 중에 되고 싶었던 것은 후자인데도 돌이켜 보면 내내 전자의 고단한 삶을 살아 옵니다. 한 때는 정말 진지하게 ‘내 사주는 왜 이럴까?’를 고민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주어진 역할이 있는 법인가 봅니다. 지금은 ‘그것이 내 인생’이라는 채념 아닌 채념으로 운명을 받아들일 쯤의 경륜이 쌓였나 봅니다. 아마도 평생을 묵묵히 희생으로 일관하셨던 제 어머니의 영향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아온 어머니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듯, 이렇게 사는 제 인생을 먼 훗날 제 스스로 대견하다 느낄 날이 오리라 믿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자그마한 명성과 함께 꿀맛 같은 안위가 저를 유혹하는 때, 바로 지금 제 마음속의 냉정한 시계는 ‘벌써 떠났어야 했다.’고 움직이기 싫은 저를 채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 그 소중함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마이크를 놓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왜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버리느냐?’는 섭섭함을 표현합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구구절절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온게임넷 스타리그가 제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칭찬으로 보내주셨던 ‘단순한 진행자가 아닌 주제넘은(?) 주인의식’은 아마도 제 스스로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탄생시킨 부모중의 하나라는 자긍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온게임넷 스타리그에 ‘누구의 것’이라는 이름표를 달 수 없습니다. 많은 온게임넷 스태프와 관련 회사들과 프로게이머와 팬들의 작품이고, 한국 게임 문화의 일부이면서 전부입니다. 그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순리가 필요합니다. 바로 ‘물은 흘러야 한다.’는 순리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새로운 캐스터는, 또 그 새로운 캐스터를 도화선으로 하는 크고 작은 변화는 늘 숨쉬며 살아있고, 성장하는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중요한 광합성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떠납니다만, 그것은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한단계 도약을 위한 불가결의 변태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늘 처음처럼…
살아오면서 참 많은 사람들에게 ‘늘 처음처럼’ 이라는 말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제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언제까지고 지키고 살 수 있게 되기를 매일 기도합니다. 그런데,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캐스터 정일훈의 처음은 어디였을까요? 그저 온게임넷 스타리그라는 명성과 그것에 환호해 주는 팬들이 시작이였을까요? 아닐겁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다소 당돌한 패기 하나로 황당한 게임 화면을 시청자들에게 들이밀며 정색을 하고 중계를 하던 그 도전정신이 오늘의 제 단초였습니다.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여타 다른 게임리그와 구별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수인가요? 캐스터, 해설자인가요? 늘 남보다 한 발 앞서 고민하고 도전하는 바로 그 패기!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편견에서 게임을, 게임 리그를 스포츠의 바로 아랫단으로 전진시킨 원동력 아닐까요? 마라토너는 달려야 합니다. 황영조는 금메달리스트이기 이전에 마라토너였습니다. 그가 달리기를 멈추었을 때 그는 빛 바랜 역사속의 과거형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다시 도전해 보렵니다. 그 결승선에 참담한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 해도 또 새로운 길을 찾아 달리는 것이 ‘늘 처음처럼’이라는 제 인생의 대명제를 거스르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게임넷 스타리그라는 성공적인 콘텐츠의 아름다운 완성은 ‘즐거울 때를 함께 나누기에 적합한’ 친구들이 만들어 주리라 믿습니다. 대신 저는 다시 가벼운 옷차림으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약속
게임 중계를 시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리고 더불어 잘 하지 않는 약속도 하나씩 늘어났습니다.
“언제까지나 게임 팬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한국의 진정한 게임 문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몸을 움직입니다. 게임이라면 애들이나 하는 것 쯤으로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게임 속의 인생을 이해 시키는 일이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면, 이제는 그 이야기의 도구가 스타크래프트에서 또 다른 것으로 전파되어도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남보다 먼저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압니다. 때로는 후배들이 제가 해야 할 고단함을 대신해 주기를 바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해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떠나서 제대로 된 액션 슈팅 게임 리그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게임도 영화나 문학처럼 공부해 볼만한 장르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온게임넷 스타리그 만큼은 안돼도 한국 게임도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고 싶습니다. 이 세 가지만 해도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대신할 만큼 무겁고 힘든 짐이라는 점을 알아주시길 부탁합니다.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스타크래프트를 사랑하느냐?”고 저는 대답합니다.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제 청중은 여러분이고, 이 이야기의 테마는 인생입니다. 지금껏 스타크래프트는 그 이야기를 전하는 도구였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보이는 것을 전달했고, 그 안에 어떤 인생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보는 사람과 함께 놀라고 감동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디지털 아니라 디지털 할아버지의 시대가 와도 정말 변하지 않는 건, 변해서는 안되는 건 사람을 위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서있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이 구비되어지는 거라는 겁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저는 사랑합니다. 제 아내와 두돌바기 아들녀석을 사랑하고,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모두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손에 잡히는 데 그것을 잡지 않는 것은 제 책임을 외면하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시적으로 떨어져야 하는 일일 지라도…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모두가 공범입니다.
제 장황한 이야기는 이제 끝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떠납니다. 아니, 실은 지난해 생방송에서 깜짝 쇼를 할 때 이미 이별을 마음 먹었습니다. 그 뒤 세 시즌은 떠나기 아쉬운 마음을 정리하는 기간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떠나는 이유는 그 자리에 싫증이 나서나, 지금껏 함께해 온 사람들을 외면하고 저를 만족시킬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나, 혹은 짤렸거나(^ ^!) 하는 이유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저는 돌아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저는 여러분 곁을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다만 또 무언가 우리의 아름다운 인생을 이야기할 이야기 거리를 찾아서 그것을 잘 다듬을 때까지 조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겠죠.
제가 사랑하는, 그리고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시는 여러분.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떠나지만 저는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며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통해 배운 것들을 갖고 이제 저는 여러분과 제가 더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 더 넓은 터전을 찾아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제가 없는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이제 여러분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제게 보내주신 그토록 많은 메일과 게시판 글과 돌아오라는 유, 무언의 압력들 만큼 이제 제가 떠나는 것이 확정됐으니 온게임넷 스타리그에 더 큰 애정을 보내주셔야 합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모두가 공범이니까 말이죠…
새로운 모습으로 뵐께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2002년 새봄 온게임넷 스타리그 캐스터 정일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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