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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5/03/11 04:36:29 |
Name |
intothestars |
Subject |
메이저리그 이야기 - 그 옛날의 박찬호 |
박찬호 선수의 팬으로서 박선수에 관해 네이버 메이저리그 게시판에 올린글을 여기도 올립니다. 다저스 시절 찬호선수 이야기를 적었구요.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겠지만(-_-) 찬호선수 팬분들은 그때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찬호선수 올해 꼭 재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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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005시즌 메이저리그 시범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페드로와 랜디존슨의 이적, 영건3인방의 해체, 약물파동 등 많은 사건이 있는 메이저리그이지만 역시 가장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코리언 메이저리거들의 활약입니다. 재기를 꿈꾸는 코리언특급 박찬호과 핵잠수함 김병현, 팀내 주전 1루수로 각광받는 최희섭, 제5선발을 노리는 서재응, 김선우, 백차승,봉중근, 메이저리그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하는 추신수등이 리그개막을 기다리며 우리가 안보인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 박찬호 선수의 팬으로서 올해는 반드시 재기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 분위기는 좋지 않고 장기계약 4년차인 올해 삭발하고 시범경기를 소화하는 찬호의 모습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언론에서는 시범경기전에는 찬호를 3선발로 평가하다가 시범경기 후에는 아직 정해진 것은 없고 선발이 안되면 퇴출될 수 있다고 압박을 합니다. 그리고 첫 시범경기는 부진했으나 어제 경기는 괜찮은 평가를 받았고 무엇보다 올해 스프링캠프의 찬호는 스스로 호언할 정도로 부상이 없다는 점에서 재기의 꿈은 조금씩 현실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그러면서 몇 가지의 스포츠사이트에서 찬호선수 관련기사를 봤습니다. 하지만 그 밑에 네티즌 코멘트란 을 보니 가슴아픈 얘기가 많더군요. 대략 이제 한국망신 그만시키고 귀국해라, 넌 해도 안된다, 먹튀야 돈 많이 벌어서 좋겠다...머 요약하면 이정도입니다. 물론 격려하는 사람도 많지만 비난(비판이 아닌 비난입니다)하는 사람이 훨씬 많더군요.
물론 찬호선수, 장기계약후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건 사실입니다. 아마 다저스에서의 혹사이후 부상 휴유증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런 이유로 우리 경제가 어려울때 서양 거구들을 삼진으로 쓰러트리며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 찬호선수를 잊은겁니까?
이제 찬호선수의 과거 모습을 한번 회상해 보면서 올시즌 찬호의 재기를 힘차게 믿어보고자 합니다.
1. 다저스 입단 이전
찬호선수는 한양대 92학번입니다. 아시다시피 92학번에 유명한 야구 선수들이 많죠. 당시 투수 3인방이라 불리던 조성민,임선동,손경수가 있고 정민철, 박재홍도 같은 또래의 선수들입니다. 박찬호는 3인방에 비해 평가는 좋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때 이미 150km의 직구를 던졌으나 컨트롤이 좋지못했죠. 재밌는건 당시 빙그레(한화의 전신)이 고졸 지명으로 박찬호를 지명했습니다. 그에게 제시한 계약금은 2천만원, 당시 고졸 최고는 이대진이 받은 3천만원이었지만 동기생인 3인방의 계약금으로 몇억이 나오는 시점에서 2천만원은 자존심이 상했던겁니다. 찬호측에서는 3천을 주면 계약한다고 했고 빙그레는 결국 계약포기합니다. 후에 연간 150억을 받는 선수를 단 1천만원때문에 놓친거죠^^
그냥 평범한 투수로 평가받던 찬호가 메이저리그 구단 눈에 뛴건 93년 버팔로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때였습니다. 당시 그는 거기서 158짜리 직구를 던져서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을 깜작 놀라게 했죠. 컨트롤은 부족하지만 그 정도 속도의 직구를 던지는건 메이저리그에서도 흔하지 않으니까요. 가장 먼저 손을 뻗은쪽은 애틀란타입니다. 애틀란타는 계약금 20만불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93년에 한국에서 최고계약금은 이상훈이 받은 1억8천만원인데 그와 맞먹는 금액이었죠. 하지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저스쪽에서 접촉을 시도합니다. LA에 연고를 둔 다저스 입장에선 많은 한인들을 끌어들일수 있고 또한 잠재력이 풍부한 찬호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애틀란타 이상의 계약금을 제시합니다. 결국 모두 다 아시다시피 1994년에 120만불에 메이저리그 직행이라는 보너스까지 받으며 다저스와 계약하게되면서 한국을 놀라게 합니다. 신인으로서 메이저에 직행한 17번째 선수가 찬호였습니다. 지금이야 메이저리그가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메이저리그는 정말 꿈과 환상속의 무대였으니까요.
2. 1994년 - 1996년
메이저리그 직행이었지만 바로 메이저리그에서 찬호선수가 적응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을것입니다. 다저스도 홍보차원에서 메이저직행을 결심한 듯한 분위기였구요. 결국 2경기정도 출전한 찬호는 바로 마이너리그 더블A로 내려가서 철저히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한 준비를 다시합니다. 컨트롤을 다듬고 투구폼을 교정하고 슬라이더 대신 커브를 익히게 됩니다.
1995년 노모가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일명 토네이도 열풍이 입니다. 데뷔시즌에 올스타전 선발까지 한 노모는 결국 13승6패에 2점대 중반(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요..ㅡ.ㅡ)의 방어율, 그리고 탈삼진왕에 오르며 신인왕에 오릅니다. 당연히 같은 동양인 출신으로서 찬호선수가 비교되었고 많은 한국인들은 찬호선수도 노모만큼 해주길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노모가 누굽니까? 일본리그를 평정하고 이제 일본엔 볼일 없다면서 부와 명예를 다 던져버리고 미국으로 건너온 투수 아닙니까?(노모의 미국 진출과정은 과거 선동열 선수의 일본진출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힘들게 건너온거죠) 그런 노모와 대학야구 경험이 전부인 찬호와 비교는 무리였죠.(나중에 결국 찬호가 노모를 넘어서긴합니다만..)
1996년!! 마이너리그에서의 수련을 다 마치고 드디어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됩니다. 2년간의 눈물젖은 햄버거는 이제 먹을일이 없어진거죠. 그에게 맞겨진 임무는 롱릴리프와 선발투수가 부상당했을때 임시선발이였습니다. 그리고 시카고 리글리 필드에서 드디어 한국인 메이저리그 첫승을 올립니다. 선발 라몬 마르티네즈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2회에 마운드에 오른 그는 4이닝을 3안타 7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냈죠. 그리고 라몬을 대신해 임시 선발투수가 되어서 다음 플로리다 말린스 전에 5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첫 선발승을 따내게 됩니다.재밌는건 당시 상대 선발투수가 케빈 브라운이었습니다.(이때 찬호는 딱 하루였지만 2승에 0.86의 방어율로 투수순위에서 방어률과 다승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후 롱릴리프와 선발을 오가면서 시즌을 마쳤습니다. 최종 스탯은 5승 5패 3.64 118탈삼진. 가능성을 보인것입니다.
기억에 남는 경기 - 199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전 11-2 승
플로리다 말린스 전에서 선발 첫승을 거둔 찬호의 두번째 선발경기. 첫 2이닝동안 6타자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일내는가 싶었는데 3회에 4타자 연속 볼넷으 내주고 강판당함. 당시 비가 와서 속옷 셔츠가 졎어 투구동작시 불편했는데 너무 긴장해서 갈아입지 못했다고 함.
3. 1997년 - 풀타임 선발투수로 등극
1997년 다저스 스프링캠프의 최고화제는 5선발을 누가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다저스는 투수왕국이었기에 다저스의 선발투수는 다른 팀의 선발투수보다 하기 더 힘들었지요. 결국 1996년에 가능성을 보인 찬호는 톰 캔티오티를 따돌리고 다저스의 5선발로서 시즌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찬호의 최고 무기는 역시 직구! 최고 160km까지 측정된 그의 묵직한 직구는 리그 최상급이였으며 그는 당시 최고의 프레임 쓰로어(flame thrower)였습니다. 거기에 낙차큰 커브까지 갖추며 그는 메이저리그 거구들과 맞섭니다.
전반기 스탯은 5승5패 3점대 초반의 방어율, 방어율에 비해 승이 낮았던건 당시 고질적이던 허약한 다저스 타선때문이었죠. 실제로 전반기 내내 찬호는 선발로 나와 4점이상을 실점한 적이 없었고 5이닝 이하로 던진적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찬호의 꾸준함은 시작된거죠. 그리고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후기리그 개막전 선발을 맞습니다.
후기리그 개막전, 상대는 배리본즈가 있는 샌프란시스코. 그는 거기서 7이닝을 3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오늘의 선수로 꼽힙니다. 그때부터 무서운 상승세를 보입니다. 슬로우 스타터로서 스타트가 시작된것입니다. 후반기에는 9승을 쌓으면서 14승 8패에 3.38 166탈삼진으로 선발투수로서의 첫해를 마칩니다. 당시 감독은 '포스트시즌 에이스를 드디어 찾았다'고 기뻐했습니다.(결국 다저스는 막판 샌프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은 실패합니다)
특히 피안타율은 .213으로 당시 외계인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페드로 마르티네즈에 이어 리그 2위를 차지합니다. 노모와 더불어 팀내 최다승이었으나 4점대 초반방어율의 노모에 비할대는 아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경기 - 7월 15일 후기리그 개막전 샌프란시스코전 11-0 승
당시 7이닝을 3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전반기부터 이어온 다저스의 연승을 이끔. 특히 2-0 으로 앞서던 7회 2사 1,3루의 위기에서 제프 캔트를 바깥쪽 꽉찬 97마일 패스트볼로 삼진 잡는 장면은 전율 그 자체였음.
4. 1998년 - 미래의 다저스 에이스로 각광받다.
1998년 그는 라몬 마르티네즈에 이어 2선발로 시작합니다. 당시 만25세의 동양인 청년이 투수왕국 다저스의 2선발이라니!! 그리고 다저스스타디움 개막경기 선발을 맡은 그는 그 경기에서 승리하나 그후 수년간 그를 괴롭힌 허리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곤 작년엔 볼수 없었던 들쑥날쑥한 피칭을 하게 됩니다. 2년생 징크스인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보란듯이 일어섰고, 라몬, 노모, 발데스 등 다른 선발들이 부상 부진으로 신음할때 홀로 끝까지 로테이션을 지키며 선발진을 이끌었습니다.
슬로스타터로서 진가를 발휘하며 7월에 5승무패 방어율 1.08로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케빈 브라운을 제치고 이달의 투수상에 오르기도 했구요. 전반기 5점대까지 치솟았던 방어율을 낮추면서 결구 15승 9패 3.71 191탈삼진으로 시즌을 마감합니다. 처음으로 15승을 넘으면서 A급 투수의 반열에 올라섰고 미래의 다저스 에이스로 각광받습니다.
1998년 겨울 그는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합니다. 개막전과 결승전 선발을 맡은 그는 결국 조국에 금메달을 안기고 자신은 병역문제를 해결합니다. 이제 그에게 날개가 달린것입니다.
기억에 남는 경기 - 9월 11일 샌디에고전 4-3 승
그해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샌디에고의 에이스 케빈 브라운과 맞붙었다. 1회에 3실점한 찬호는 그 후 7회까지 탈삼진 10개를 잡으면서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한편 6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은 케빈 브라운은 7회 수비수의 실책으로 4실점(비자책)하면서 패전투수가 된다. 1996년에 이어 케빈 브라운과의 맞대결 2번 모두 승리한 순간.
5. 1999년 - 메이저 데뷔후 첫 추락
1999년 스프링캠프에서 찬호의 최대화두는 체인지업. 직구와 커브만으로 15승을 올린 그에게 체인지업만 장착된다면 20승에 사이영상까지 가능하다는 분석이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또한 우승청부업자 케빈 브라운이 에이스로 영입되면서 찬호는 케빈 브라운에게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많은 기대속에 맞은 1999년, 하지만 지난 겨울 아시안게임 출전에 따른 휴유증인지, 허리부상때문인지, 뜻모를 부진에 빠집니다. 158을 넘나들던 직구구속도 줄어들고 위력도 약해지면서 그는 한이닝에 한명의 타자에게 만루홈런을 두번허용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시비거는 애너하임 선수에게 날아차기(!!)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부진에 대한 언론의 비난도 한층 심해져 당장 찬호를 트레이드 해야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다저스는 팀의 부진을 찬호를 비롯한 발데스, 드라이포트등 당시 다저스 영건3인방의 부진으로 돌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26세의 젊은 선수에게 팀의 2선발을 맞겨놓고 그가 부진했다고 비난하는 모습은 가히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슬로스타터 답게 후반기에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 그는 결국 부진했음에도 13승을 올리며 시즌을 마무리합니다. 특히 마지막 9경기에서 7승1패를 기록하면서 다음시즌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또한 찬호는 당시 에이전트였던 스티븐 김 대신 보라스와 계약을 맺습니다. 시즌 스탯은 13승 11패 방어율 5.23 174탈삼진
기억에 남는 경기 - 4월 24일 세인트루이스전 5-12 패
찬호의 메이저리그 경기 사상 최악의 경기. 이 경기에서 찬호는 타티스에게 1이닝동안 2개의 만루홈런을 허용했다. 메이저역사상 한 타자가 1이닝에 2개의 만루홈런을 허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6. 2000년 - 메이저리그 특급투수로 도약하다.
사이영상 후보로까지 올랐다가 추락한 1999년. 찬호 역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을 맞습니다. 지난해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약간의 불안한 모습도 보입니다. 전반기를 9승6패 4.17의 방어율로 마무리. 승은 많았으나 방어율이 높았죠. 하지만 전반기 중반 5연승을 달리기도 하면서 확실히 좋아진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후반기, 이제 무적의 찬호시대가 시작됩니다. 그의 직구는 1997년에 비할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90마일 중반에 묵직한 맛이 살아있었고 무브먼트 또한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최고 무기가 된 커브가 완성되면서 그는 후기리그를 휩씁니다.(역시 슬로 스타터) 후반기는 9승4패 2.23의 방어율. 특히 2.23의 방어율은 당시 후기리그1위였습니다.
시즌 스탯은 18승10패 3.27 217탈삼진 .214의 피안타율. 다승 5위, 방어율10위, 탈삼진 피안타율은 2위였습니다.(참고로 볼넷도 124개로 2위였죠.ㅡ.ㅡ) 동양인 최다승을 올렸고 사이영상후보로 떠올랐습니다. 허약한 다저스 타선이어서 18승이었지 다른 팀이었다면 20승은 넘고도 남았을만큼 최고의 한해였습니다.
더구나 내후년이면 자유계약선수가 되기에 그의 성적은 더 돋보였습니다. 당시 찬호와 자주 비교되었던 마이크햄튼이 콜로라도와 8년간 1억3천만불에 계약하면서 찬호가 이것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조심스럽게 미국언론에 보도되었고 일부에서는 투수최초 2000만불을 받을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기억에 남는 경기
2000년엔 찬호의 명경기들이 많습니다. 최고의 한해를 보낸 덕분이기도 하지요
1) 5월 14일 - 세인트루이스전 3-1 승
당시 내셔널리그 최고의 좌완루키 릭 엔키엘과의 선발 맞대결! 당시 찬호는 8이닝 동안 탈삼진 12개를 잡으며 1실점으로 호투했으며 릭 엔키엘은 7이닝을 탈삼진 10개에 무실점으로 막았다. 하지만 8회 구원진의 삽질로 결구 다저스의 3-1 승리.
2) 8월 30일 - 밀워키전 7-2 승
이 경기는 내셔널리그 투수가 호투한 경기 5위안에 든 경기다. 8이닝을 1안타 2실점 14탈삼진으로 막았다. 14탈삼진은 찬호 최고 기록. 유일한 안타였던 홈런이 없었다면 노히트노런도 가능했던 순간.
3) 9월 30일 - 샌디에고전 3-0 승 첫 완봉승
찬호의 첫완봉승으로 기록된 경기. 시즌 마지막경기였던 이 경기를 찬호는 9이닝을 2안타 무실점 13탈삼진으로 막고 화려하게 마무리를 했다. 특히 허약한 다저스 타선이 득점을 해주지 못하자 상대선발 우디 윌리암스에게 솔로홈런을 뽑으면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함.
7. 2001년 - 최고의 순간에서 부상으로 신음하다
2001년은 자유계약선수가 되기전의 마지막 시즌이기에 어느해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부상당한 몸으로 시즌끝까지 뛰었고 결국 장기계약을 이끌어내나 부상으로 계약후 계속 부진하게 됩니다.
여튼 2001년 시즌 초반은 2000년 후반의 연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직구 구속이 조금씩 줄어들었으나 커브의 위력은 여전했고 그는 매게임을 6이닝 3실점 이하로 처리했습니다. 전반기 성적은 8승5패 2.80, 다승을 제외한 방어율, 피안타율, 탈삼진이 모두 리그 5위안에 들었고 선발로 뛴 19게임중 17게임을 퀄러티 스타드(그중 15게임 연속, 이건 역대 내셔럴리그 타이기록)을 기록하면서 올스타에 선정됩니다. 무엇보다 그는 슬로스타터였기에 이런 뛰어난 전반기 성적에 후반기 성적이 더해진다면 작년을 넘어서는 최고 시즌이 될거라고 모두 예상하게 됩니다.
그시점에서 베이스볼 위크리는 올해 FA 랭킹1위로 박찬호를 꼽습니다
기사 번역문
Top 20 free ag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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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세) 1. Chan Ho Park, Dodgers:
Dodgers는 지난 겨울 그와의 계약을 지연시켰다. 결론만 이야기한다면 대단 히 큰 실수가 아닐수 없다. FA 시장에 나오는 투수들의 숫자는 Nasdaq 지수 보다도 훨씬 하락하고 있다. Park은 8년간 총액 1억2천1백만달러로 계약했던 Mike Hampton을 제치고 최고 연봉의 투수로 올라설것이 확실시된다.
(당시 주요FA로는 배리본즈, 재이슨 지암비, 후안 곤잘레스, 존 스몰츠등이 있었고 메이저리그는 투수보다 타자 연봉이 많다는점에 기인하면 찬호의 랭킹1위는 대단한건죠) 그도 그럴것이 2000년 후반기와 2001년 전반기를 한 시즌으로 묶으면 찬호의 성적은 다승, 방어율, 탈삼진, 피안타율 등 모든 부분이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5위안에 들었으니까요. 거기다가 아직 20대의 나이이니 투수최고연봉은 당연한듯이 여겨졌고 과연 2000만불을 받느냐에 초점이 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허리부상악화와 전반기의 무리한 출장(그는 전반기 이닝수와 투구수가 리그3위권이었습니다..ㅡ.ㅡ)으로 인한 휴유증인지 무기력한 모습을 몇번 연출하고 다저스 코칭스테프와 의견충돌도 일으키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져갑니다. 무엇보다 당시 다저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이 가시권에 있었으나 후반기 결국 애리조나에 덜미를 잡히게 되는데 이게 찬호부진때문이라고 LA언론이 난리치면서 그의 몸값은 떨어지고 결국 다저스와 결별하게 됩니다. 물론 찬호가 후반기에 부진했지만 그는 아픈몸을 이끌고 끝까지 로테이션을 지켰습니다. 부상으로 나가 떨어진 케빈 브라운, 대런 드라이포트, 앤디 애쉬비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결국 싫은 소리는 다 듣게 되고.. 참으로 프로세계의 냉정함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게 시즌을 마무리합니다. 15승11패 3.50 218 탈삼진 퀄러티 스타트 26회, 역시 탈삼진과 피안타율, 퀄러티 스타트는 리그 3위였으나 예년과 달리 후반기 성적이 너무 안좋아서 여기저기서 안좋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홈에서만 강하다, 부상이 있다, 에이스감이 아니다... 거기다 FA시장의 거품이 빠지면서 2000만불은 고사하고 투수최고연봉도 안된다는 평가가 나왔고 결국 우여곡절끝에 텍사스와 5년간 6500만불에 계약하게 됩니다. 당시 이 계약도 미국 언론에서는 텍사스가 삽질한 것이라고 평가했었죠. 그리고 이어진 부상으로 인해 3년간 부진에 빠지고 지금 재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경기
1) 7월 19일 밀워키전 5-0 승 최초 무사사구 완봉
퍼팩트나 노히트 노런을 하기 위해서는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운도 필요하다. 안타성 타구를 수비가 잡아주면 노히트가 가능하나 빚맞은 타구나 수비 실책으로 안타가 되면 아무리 잘던져도 노히트는 불가능하다. 즉 안타는 투수가 아무리 잘던져도 무조건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면에서 무사사구 완봉은 야수의 수비를 제외한다면 투수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피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날 단 2안타에 무사사구 완봉승을 한 찬호의 피칭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특히 이날 안타중 1개는 빚맞은 안타였고 나머지 1개도 단타였을 뿐이다.
2) 8월 4일 시카고 컵스전 1-2 패
컵스의 케리 우드와의 맞대결. 내셔널리그의 대표적인 20대 파워피쳐의 대결로 관심을 모은 경기. 6회까지 두 투수는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7회 다저스가 1점을 획득하면서 균형이 깨졌다. 이날 찬호는 7회까지 2안타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최고구속이 93마일에 불과할 정도로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즉 8회가 교체타이밍이었으나 계속 찬호로 밀어붙였고 결국 찬호는 8회 2실점 하면서 패전투수가 되고 만다.
8. 경기 외적인 찬호
경기외적으로 찬호선수는 순수합니다. 그는 미국으로 간 후 스캔들 한번 없이 오직야구를 위해서만 살아왔습니다. 조금 뜬 후 스캔들 빵빵 뿌리던 김승현, 이천수, 고종수 등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그는 한국에 있는 어떤 스포츠 스타보다도 많은 연봉을 받고 인지도 또한 최고이지만 항상 야구만 생각했지 기타 도박, 연애, 스캔들등은 없는 깨끗한 사생활을 보여줍니다. 정말 우직할정도지요. 그리고 국가와 국민들을 생각합니다. 그는 매년 불우이웃돕기 및 수재민 성금으로 몇억씩 기탁했습니다. 찬호 이름의 장학재단도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욕할수 없는건 그가 대단한 노력파라는 겁니다. 천재형이 아닌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눈물젖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올라왔습니다. 메이저리그 입성 그리고 정상급 선수가 된 이래로 찬호가 훈련게을리한다는 얘기는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스타가 된 후에도 훈련 전 운동장 20바퀴를 돌고 훈련을 시작했답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노력하는 선수가 왜 욕을 먹어야만 하는겁니까... 더구나 올해는 재기를 위해 철지부심하고 있는 선수에게 격려는 못할망정 너 안된다 이딴 소리나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과거 찬호선수 전성기 시절 미 언론과의 인터뷰가 한국 언론에 공개된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한국국민의 기대때문에 연애도 못하고 다른 것도 못하고 오로지 야구만 해야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솔직히 그정도 인지도에 연봉이면 다른것의 유혹에 빠질만도 합니다. 이 얼마나 순진하고 우직한 청년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그를 이렇게 외롭게 만든겁니까?
우리나라는 영웅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지난 98월드컵때 차범근 감독이 그랬고 지금 박찬호 선수도 비슷한 처지입니다. 왜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던것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고질적인 냄비 근성 때문인가요? 아님 엉터리 스포츠신문에 놀아나서 그런건가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박찬호는 올해 다시 마운드에서 포효할것이라는겁니다.
박찬호 다저스 시절 Career
(순서) 연도, 승, 패, 방어율, 선발등판,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포볼, 탈삼진, 피안타율, 9이닝평균탈삼진
1997 14 8 3.38 29 2 0 192.0 149 24 70 166 .213 7.78
1998 15 9 3.71 34 2 0 220.2 199 16 97 191 .244 7.79
1999 13 11 5.23 33 0 0 194.1 208 31 100 174 .280 8.06
2000 18 10 3.27 34 3 1 226.0 173 21 124 217 .214 8.64
2001 15 11 3.50 35 2 1 234.0 183 23 91 218 .216 8.38
career high 2000, 다승 5위, 방어율 10위, 탈삼진.피안타율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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