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dreamer의 자유단상 - #2. 나를 강하게 하는 힘, 라이벌
라이벌(rival)
라이벌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어떤 분은 어떤 수를 써도 이길 수 없었던 - 공부건 운동이건 스타건 뭐건 간에 - 친구나 선후배가 떠오르실 것이고, 어떤 분은 역사상의 사례를 떠올리실 것이고, 또 다른 분은 스포츠에서의 맞수를 떠올리시겠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영영사전에서 rival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If you say that one thing rivals another, you mean that they are both of the same standard or quality.
‘같은 등급이나 품질’…… 주로 사람에게 쓰는 라이벌이란 말에 품질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아무튼 ‘라이벌’이라는 말의 좋은 정의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즉 라이벌의 조건에는 ‘동등한 실력’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일까요?
라이벌의 조건
동등한 실력을 1번으로 놓고 다른 조건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옛날 프로농구에서의 삼성과 현대, 축구에서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저한테 먼저 떠오르는 건 선수가 아니라 한일전이네요. 고려대나 연세대 다니시는 분들은 연고전을 떠올리실법도 하구요. (각각의 대학을 앞서서 한번씩 적어줬으니 불만 없으시길. ^^;;)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좋은 라이벌의 두 번째 조건이 나옵니다. 바로 ‘상대에 대한 투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를 쓰고 이기려고 하고 때로는 거친 플레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샌프란시스코와 LA는 유명한 라이벌 관계인데요, 몇 년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가 0.5게임차로 애틀랜타에 뒤져서 지구 2위였던가 그럴 겁니다. 마지막 게임이 LA와 있었구요. 당시 LA는 탈락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슬슬 상대할 거라고들 대부분 생각했고, 그래서 다들 샌프란시스코가 지구 우승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웬걸. LA는 허샤이저, 라몬 등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샌프란시스코를 이기려고 기를 썼고, 결국 애틀랜타가 대역전 지구우승을 이끌어내었습니다. 또 한일전에서는 우리 선수들의 전투력(…)이 120% 이상 발휘된다고 하죠. 이 정도의 투지를 가지고 맞붙는 관계라야 비로소 라이벌이란 호칭이 붙습니다.
다음 조건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승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프로농구 삼성팀에 있는 김택훈 선수는 대학 재학 당시 현주엽 선수에게 상당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농구팬들은 이 둘을 라이벌 관계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또는 더 적나라한 비유로, 제가 이윤열 선수를 라이벌로 생각한다고 해서 누가 저와 이윤열 선수를 라이벌로 생각해 주겠습니까? (……) 즉, 승부가 뻔하면 라이벌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꼭 50%일 필요는 없지만, 또 가끔은 어이없는 승부가 나오기도 하지만, 항상 어느 누구도 승부를 쉽게 말할 수 없는 관계. 이것이 라이벌의 조건이겠죠.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의 스타성을 들 수 있습니다. 냉정한 말이지만, 무명 선수 두 명이 항상 붙으면 흥미진진한 경기를 보여주면서 승률도 비슷비슷하다고 해서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만 설명해도 다들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더 쓰면 제가 너무 차가워질거 같아서요.)
정리하면, 라이벌의 조건은
(1) 서로간의 동등한 실력
(2) 서로를 이기고자 하는 강한 투지
(3)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승부의 결과
(4) 일정정도 이상의 스타성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
이들 조건에 가장 잘 들어맞는 라이벌 중 하나가 바로 80년대 NBA를 양분했던 두 명의 위대한 선수, 매직 존슨(Earvin "Magic" Johnson)과 래리 버드(Larry Bird)입니다. 같은 해에 NBA에 데뷔한 이들 둘로 인해, 당시 결승전을 녹화 중계해 줄 정도로 인기가 땅에 떨어져 있던 NBA는 재도약의 계기를 맞게 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매직 존슨은 포인트 가드이고 래리 버드는 포워드였습니다. 매치업 상대도 아니었고, 서로 팀에서 하는 일도 달랐죠. 하지만 둘 간의 라이벌 의식은 말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매직은 “매년 경기 일정이 나오면 맨 먼저 셀틱스 경기가 언젠지 확인하고 나서 동그라미를 그려놓았습니다. 저에게는 시즌 일정이 셀틱스와의 두 경기와 나머지 80경기였으니까요.”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버드는 한 술 더 떠, “저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박스스코어를 확인해 매직의 기록을 뒤지는 것이었어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1979년 NCAA 결승전에서 맞붙은 것을 시작으로 이들은 정말 피튀기는 대결을 계속합니다. 매직의 말처럼 1년에 겨우 두 번 경기할 뿐이었지만 정말 이를 악물고 뛰었더랬습니다. LA가 22승 15패로 근소하게나마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저 눈 앞의 공을 좇아 달리고, 넘어지고, 던지고, 막고, 때로는 거칠어지고…… 보는 사람이 저절로 흥분하게 되는 그런 경기였죠.
분명히 스타크래프트 칼럼인데 아직 스타 얘기가 한 줄도 안나왔네요. (……) 이들 둘 간의 라이벌 의식을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 예만 들어드리고 스타 얘기로 돌아갈까 합니다. 1984년 NBA 결승전이었습니다. 버드로서는 1979년 대학 결승전에서 매직의 미시간 주립대학 팀에 졌던 복수를 할 좋은 기회였죠. 하지만 막상 결승전이 시작되자 매직을 필두로 하는 LA의 런앤건, 이른바 ‘쇼타임showtime’(앗, 김대호 선수다!)에 말려버리고 맙니다. 세 번째 게임에서 137-104로 버스를 타버리고(……) 난 뒤 버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언론에 “우리는 여자애들sissies처럼 뛰었다”라고 팀 동료들을 비난합니다. 이후 팀 동료들은 완전히 사기가 올라, 네 번째 게임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보스턴 셀틱스 선수들의 거친 수비에 LA 선수들이 말려버린 거죠. 이전까지는 속공과, 매직의 패스와, NBA 득점 통산 1위인 카림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으로 손쉽게 앞서나갔었다면, 이제부터는 득점 할때마다 그 댓가를 치러야 했던 겁니다. 결국 연장전에서 버드의 활약으로 보스턴 셀틱스가 2승 2패를 만든 후 최종 7차전에서 승리합니다. 얼마나 이기고 싶었으면 팀 동료들을 ‘여자애들’이라고 비난했을까요. 그것도 키가 2미터나 되는 거인들을 말입니다. 또 그런 열정에 반응한 팀 동료들은 얼마나 투지에 불타올랐을지…… 직접 보지 못하고 하이라이트 필름으로만 보는 지금이 정말 아쉬울 따름입니다.
임요환과 홍진호
이들 선수와 닮은 선수를 꼽으라면 저는 서슴없이 임요환 선수와 홍진호 선수를 꼽겠습니다. 매직이 임요환, 버드가 홍진호. 각각의 쌍에는 공통점이 참 많습니다. 대체 어떻게 알고 패스를 찔러주는지, 순간적인 센스가 스타급이었던 매직, 역시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센스나 깜짝 전략이 대단한 임요환 선수. 포워드이면서도 어시스트와 리바운드에 능했고, 3점슛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할 정도로 다재다능했던 버드, 항상 최정상급 저그로 꼽히면서도 다른 종족도 수준급이라고 하고 팀플마저도 잘하는 홍진호 선수.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을 공통적으로 묶어주는 것은 라이벌 관계입니다. ‘Lakers vs Celtics’라는 컴퓨터 게임(아마 대부분 해보셨을 겁니다. 삑, 삑, 삑 하고 공 튈때마다 소리나던 그 게임)이 나올만큼 대단했던 매직 vs 버드의 경기, ‘임진록’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항상 최고의 관심도와 집중도, 그리고 재미있는 게임이 나오는 임요환 vs 홍진호의 경기. 그들 각각도 리그 최정상급 스타이면서, 서로간 전적이 28:25일 만큼 승부는 예측불허, 팀 동료를 ‘여자애들’이라고 부르거나, 세 경기, 아니 발해의 꿈 포함해서 네 경기 연속 벙커링을 구사할 정도로 서로를 이기고자 하는 투지도 대단하고…… 아마 짐작들 하시겠지만 애초부터 라이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쓰려고 했을 때부터 임요환 vs 홍진호가 나올 거였습니다. ^^;; 어느 한쪽이 버스 타버린 경기도 많지만, 명경기도 넘쳐날 정도로 많습니다. 존슨에게 스카이훅의 창시자인 압둘-자바를 두고 매직 존슨이 스카이훅을 넣어 역전시켜 이겨버린 1985년 결승전이 있다면, 버드에게는 앞에서 이야기한 게임이 있죠. 임요환 선수가 아직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경기로 꼽는 코카콜라배 결승전 1경기를 꼽는다면 홍진호 선수는 내게도 KPGA winner's 챔피언십이 있다고 내세울 수 있을 겁니다.
라이벌의 존재 의의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버드가 없었더라면 과연 매직이 저렇게까지 잘 할 수 있었을까. 홍진호가 없었더라면 임요환의 지금의 명성은 있을 수 있을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이기기 위해 피터지게 연습하고, 이겨도 다음 경기를 준비하며 방심하지 않고, 지면 절치부심, 와신상담, 권토중래, 또 뭐있더라...(--;) 암튼 이를 갈며 다음에 이기겠다 결심하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룰 안에서의 공정한 경기, 그러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새하얗게’ 불태우는 그런 명 경기.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면 그런 경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어쩌면 매직이 있기에 버드가 더욱 빛나는 것이고, 임요환이 있기에 홍진호가 더욱 빛나는 것이겠지요. 반칙을 써서 비겁하게 승부하지 않는 이상, 동등한 실력의 라이벌은 나를 빛나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매직의 쇼타임이 보스턴 셀틱스 상대로 펼쳐질 때 더욱 화려했었고, 버드의 어이없는 자세에서 던져도 들어가는 슛이 레이커스 상대로 더욱 정확했듯이, 임요환 선수의 컨트롤이 홍진호 선수를 상대로 할 때 “왜 마린이 안 죽을까요”라고 할 만큼 정교하고, 홍진호 선수의 공격이 임요환 선수를 상대로 할 때 더더욱 날카롭듯이. 경기 중에는 이를 악물고 이기기 위해 마지막 유닛 한 기까지 컨트롤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나면 언제 우리가 피튀겨가며 싸웠냐는 듯이 웃으며 농담하고 “거기서 그걸 꼬라박으면 당연히 지지~”하는 친구 사이로 돌아가는, 서로를 더욱 빛내어주고 그러면서 자신도 더욱 빛나게 되는 라이벌 관계.
두 선수의 라이벌 관계가 앞으로도 오래 가기를 기원합니다. 또 신인급 선수 중에서도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하여 ‘새하얗게 불태우는’ 경기가 앞으로도 계속 나오길 기원합니다.
다음회 예고
……먼저 이번 글은 정말 제가 읽어봐도 못 썼다는 생각이…… 범작 사이에 졸작이 섞여 있으면 그나마 범작이 반사효과로 조금 나아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그냥 올립니다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께 정말 죄송합니다. 이게 몇 번 지웠다 썼다 한 결과인걸 보니 한숨밖에 안나오네요. 어디까지나 '자유'단상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합니다만...(퍽!)
다음 글에는, ‘박정석과 경상도 남자’ 아니면 ‘저그스러움’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언제쯤 올라올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OTL) 다음 글은 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해 볼게요. ㅠㅠ
임요환 선수와 홍진호 선수의 사진은 bwtimes.net의 구리종 님과 레테 님의 게시물에서 링크 따왔습니다. 무단링크, 죄송합니다 (_ _)
많은 관심과 반박, 특히
소재재공 부탁드립니다.